동산 야구사
1966년 6월 시행된 청룡기대회 지역 예선에서 인천고와 동인천고를 누르고 본선출전권을 획득하였다. 에이스 이은호 투수를 비롯한 4명의 선수가 일본원정의 관록을 가진 베테랑으로 어느 팀보다 꽉 짜인 팀워크를 자랑할 때였다. 특히 최치남, 박용주, 장영수의 내야수비는 가히 ‘철통’이라는 평을 들었다. 「청룡기를 다시 인천으로」라는 야망에 불타는 투혼을 가다듬으며 출전하였다. 다음은 대진표다.
1차전 전주고와 대결에서 본교 1회 초 장원순이 숏 땅볼로 진출하여 2루와 3루 도루에 성공하였다. 3번 장영수의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얻고, 3회 전주고 내야수의 2차례 연이은 범실로 1점, 5회 1점, 7회 연속 3안타로 2점을 얻어 6 : 1로 승리.
2차전 동대문상고와 대결에서 동대문상은 2회 초 4번 타자의 2루타 5번 타자가 사구로 출루, 8번 타자의 2루타로 2점을 선취하여 기세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본교는 4회에 들어가 타선이 터지기 시작, 5번 정용택, 6번 최치남의 연속 안타, 8번 박용주의 안타로 1점, 9번 지원우가 친 3루 앞 땅볼을 동대문상이 판단착오로 홈에 송구하자 야수 선택으로 처리되어 1점 추가, 이어 1번 장원형이 때린 3루 앞 땅볼을 판단 착오를 일으켜 1점 추가. 2번 조규헌이 센터 앞 희생플라이를 날려 지원우가 홈인, 4점을 얻어 4 : 3으로 역전하며 어렵게 승리하여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전에 오른 본교는 12일 대구상고와 시합을 벌였으나 이기호의 대회 첫 홈런에도 불구하고 4 : 4 동점으로 재시합을 갖게 되었다. 재시합 결과 6회 말 적시안타 2개로 2점을 선취하여 2 : 1로 승리, 결승전에 오르게 되었다.
패자부활전에서 연승하며 결승에 진출한 대구상고와의 시합에서 아깝게 분패하여 1승 1무 1패의 전적으로 다시 재시합을 갖게 되었다. 7년 만에 맞이한 절호의 기회를 그저 넘겨 줄 수 없는 본교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시합에 임했다.
최종 결승전은 이름 그대로 기적의 연출이었다. 대구상은 3회 초 1사 1 ․2루의 찬스를 맞아 2번 타자의 레프트선상으로 빠지는 3루타, 3번 타자의 스퀴즈로 3점을 선취하여 앞서가기 시작하고 5회, 7회에 1점씩 추가, 승리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8회말 2사 후 만루의 상황에서 대구상의 실책에 힘입어 한꺼번에 4점을 얻어 우승 일보직전에 있던 대구상을 무너뜨리고 7년 만에 청룡기를 되찾아 서울운동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바꾸어 놓았다. 대구상과 네 번째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2승 1무 1패로 앞서며 청룡기를 다시 동산의 품에 안게 되었다.
우승의 기쁨을 안은 채 밴드부를 앞세우고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인천 거리를 누비는 동산의 건아에게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하였고, 다시 한 번 인천 건아의 명예를 시민들의 가슴 속에 깊이 심어주었다. 이로써 동산은 10회, 11회, 12회, 14회, 21회에서 다섯 번의 청룡기를 차지하는 관록을 보여 주었다.
윤갑로 시장을 방문하여 개선보고를 하자 선수 전원에게 꽃다발을 걸어 주고 선전을 치하하며 앞으로 계속 야구로써 인천의 영예를 전국에 떨칠 것을 당부하며 금일봉을 하사하였다. 또한 경기도경찰국 안명수국장을 예방하여 우승보고를 하자 금일봉을 주시며 치하하였고 경기일보를 방문했을 때 洪 부사장 역시 금일봉을 주시며 격려해 주었다.
「경기매일」1966년 6월 18일자 금주의 인물란에 실린 박현덕 감독에 대한 기사를 이곳에 옮긴다.
“서울야구장의 2만 관중과 라디오 중계를 듣는 수많은 인천의 야구팬을 환호와 실망이 뒤범벅이 되도록 흥분과 낙담으로 몰아치던 조선일보사 주최 제21회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명문 인천동산고교는 패자전에서 재기한 대구상고와의 열전 끝에 5 : 2의 전세를 8회 말에서 적실 등으로 일거에 4점을 얻어 뒤엎고 14회 대회 우승 이래 실로 7년 만에 청룡기를 차지해 내 고장 경기로 금의개선했다. 이 영광의 그늘에는 동산고 박현덕 감독의 저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올해 출전한 선수들이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21년 전에 박현덕 감독은 교원으로 근로하던 동산고에 야구부를 손수 창설, 감독의 자리에 앉아 야구만이 천직인 양 한눈 한번 안 팔고 온갖 쓰라림을 혼자 씹으며 ‘동산야구’를 키워 오늘에 이르렀다 인천을 가리켜 전통의 야구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전통이란 계승자가 착실해야 빛을 낼 수 있는 법 - 헤일 수 없는 부침의 고비를 넘으며 허다한 세론에 현혹됨이 없이 오늘까지 걸어온 박현덕의 공이야말로 전통의 계승자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이번 대회를 치르는 동안, 더구나 대구상고와는 승자결승에 대치 - 동점으로 재시합을 가져 신승을 하고 패자전에서 재기한 대구상고와 다시 만나 연장전에 패퇴, 마침내 4차전으로 최종 자웅을 가름하는 기이(?)한 싸움을 벌였다. 패자전에서 올라 온 대구상고와의 1차 결승에서 야구통이라면 거의가 동산 7 …대구상 3으로 낙승을 예측했지만 결과는 정반대 - 동산은 빈번히 기회를 놓치고 궁지에 몰리어 청룡기는 전연 가망이 없을 것으로 웬만한 팬은 중계방송을 듣는 도중 라디오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도대체 박현덕의 작전이 글렀다는 것이다. 왜 정공법을 무시하여 완전 득점 찬스를 놓치냐는 것. 해설자도 그렇게 말했지만 - 사실 결과로 보아선 그러한 실례가 여러 번 있었다. 허나 여기에 대해 박현덕은 한마디 한다. 그의 특유의 아집(?)을 내세우며 ‘그건 모르는 소리 … 우리 애들의 타율이 평균 2할 5분대요. 스퀴즈나 보내기 번트보다 적의 허를 찌르는 ‘히팅’책이 오히려 확률이 더 있는 걸 … 정공법에 대해선 상대들이 너무 연습을 많이 쌓은 점도 있고……’ 이렇게 그는 우승의 기쁨을 가누지 못하면서 ‘박현덕 류’의 경지를 간다. 불원 그의 나이 50. 박현덕 하면 ‘야구동산’을 연상할 만큼 우리나라 야구계에서의 그의 지보는 확고하다. 그의 계씨 박현식을 동산중학교 때부터 길렀고 불세출이라고까지 일컬은 신인식 투수(이 대회서 연 3년 제패)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도 그요, 지금 국내 실업팀에서 동산 출신이라고 이름 붙은 선수는 누구 하나 그의 손때 묻지 않은 제자라고는 없다. 그의 애칭은 ‘코끼리’다. 육중한 몸집으로 보아 그럴 법도 하다. 그는 누구보다 야구 이론에 밝았다. 규정 해석에도 절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시합 도중에 ‘어필’을 한다. 그러면 미처 분석도 않고 ‘떼거리’라고 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여기에 그의 서글픔은 이만저만 아니다. 그러나 코끼리와도 같이 점잖게 참고 야구에 이겨야만 했다. 실력을 길러야 했다. 화려한 중앙을 그는 넘나보지 않았다. 오직 동산이면 족했다. 동산 이상도 없고 동산 이하도 없는 것이 그의 전부인 듯…… - 어떻소, 박 감독 오래간만에 금년 들어 우승도 두 번이나 했고 이제 썰물 때가 되지 않았소? - 글쎄……. 하면서 아직도 현역감독에의 미련이 귀여운 연인의 체취처럼 감도는 인상을 가느다란 눈매에 띠었다.” |
주요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투 수 이은호 | 투 수 이기호 | 포 수 정용택 | 1루수 장원순 | 2루수 최치남 |
3루수 박용주 | 유격수 장영수 | 좌익수 지원우 | 중견수 조규헌 | 좌익수 마훈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