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야구사
1950년대 초는 6․25전쟁으로 야구부의 활동이 휴식에 들어간다.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던 자유신문사가 폐간됨으로써 8회 대회부터 조선일보사가 인수하여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로 개명하여 맥을 잇게 되는데, 50년 제5회, 51년 제6회, 52년 제7회 대회는 전시(戰時) 중이었으므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비록 전시였지만 다소 안정을 찾아가던 1951년 6월 1일부터 수업을 재개하는데, 당시 본교 송림동 교사(校舍)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신흥초등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전시(戰時)수업을 하게 된다. 이 때 야구부원들은 초등학교의 좁은 운동장이었지만 훈련을 재개하는 의지를 보였다.
야구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던 학교에서는 야구부원들의 열정에 감동하여 당시 야구부원이던 김만근(3회)에게 일금 40만원을 지급하여 장비를 구입하도록 한다.
교사(校舍)를 빌려 쓰는 것도 미안한 처지에 운동장까지 야구부원들이 차지하여 학교에서는 신흥초등학교에 민망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면 다른 곳으로 옮겨 훈련을 하는 상황에서도 연습에 열중하며 기량을 연마하였다. 김만근, 문영진, 황광현, 조순문, 박승길, 김동철 등이 당시 주전 멤버였다.
학교에서는 야구부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유웅렬 선생을 부장으로 임명하고 박현덕 선생을 감독으로 재초빙하여 야구부가 재도약할 수 있도록 한다.
젊은 박현덕 감독은 그 독특한 패기로 훈련 지도는 물론, 필요한 야구용품, 특히 글러브와 볼 등을 미군 부대에서 얻어오면서 야구부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교육법의 개정으로 1951년 8월 31일부터 6년제 동산중학교는 동산중학교와 동산고등학교로 분리된다. 이에 중학교에도 저학년 학생들로 선수를 구성하여 야구부가 창설되었다.
중학교 초대 야구부장에는 김종현 선생이 임명되었고,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창단 첫 대회인 도내중학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때 중학교 주전 선수는 이기상(중5회), 한학수(중5회), 박준호(고5회), 이강호(중6회), 김진영(중5회), 박하성(고7회), 곽인성(고3회), 박의양(고6회) 등이다. 이들 중 이기상, 김진영은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53년, 1954년 인천고등학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이는 바로 동산중학교에서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혔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천고등학교 야구부가 1952년 10월 제33회 전국체전 우승, 1953년 제8회 · 1954년 제9회 청룡기 연속 우승을 하던 때에,
본교 야구부는 지평선 아래에 광명(光明)을 숨긴 채 수면 위로 막 모습을 드러내려는 우승을 위한 여명(黎明)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