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야구사
(1) 탄생의 배경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42년부터 근로봉사라는 미명으로 학생들을 전쟁의 도구로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모내기, 타작, 비행장 신축 및 확장 고사포 진지 구축 등을 이유로 몇 개월씩 학생을 동원한 것이다.
본교에서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 부평 소재 조병창으로 근로 작업에 학생들을 동원하였고, 학생들의 노력봉사에 대한 사례금으로 48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교사의 월급이 100원이었는데, 수백 명이 동원된 몇 개월의 노동 대가로 참혹하게도 48원을 받은 것이다.
그 후 해방이 되었고, 해방의 기쁨 속에서 무엇인가 자유를 만끽하고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던 학생들이 바로 이 48원에 대한 지출 문제를 논의하던 중, 즐기고 싶었던 ‘야구’에 대하여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교과수업 외의 시간에 전교생이 참여할 수 있고, 학생들을 결속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뜻을 일치하게 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학교에 전달하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취지에 적극 찬동하여 일금 48원을 학생들의 요구대로 지출하게 되었다.
(2) 창단 초기의 모습
이를 계기로 1945년 9월 <야구부 발기회>를 갖고 박현식(6중 1), 하명호(6중 1), 한명진(6중 1) 등이 야구용품을 구입하면서 부원을 모집하고 스스로 훈련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전문적인 지도자가 없이 스스로 규율을 익히고 감독·코치·선수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일치단결하여 훈련을 해 나가려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박현식(6중 1)의 형 박현덕 선생이 연희전문학교에서 야구부원 생활을 하였기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야구부원들의 열성을 보고 박현덕 선생을 야구부 감독으로 초빙하여 야구부의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박현덕 선생이 1946년 3월 1일, 28세(1919년생)에 야구감독 겸 부기교사로 부임된 것이다. 20대의 젊은 감독은 그야말로 온 정열을 쏟아 야구부원들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여러모로 야구부의 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우선 야구용품이 부족해서 글러브는 항상 꿰매어 사용했고, 심지어 저학년 학생들의 일과에는 야구공을 꿰매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또, 선수들 모두 좁은 운동장(현재 고등학교 본관 앞 화단 포함)에서 야구장을 확보하느라고 돌을 고르고 바닥을 다지기도 하였다.
박현식(투수), 이근배(포수), 하명호(1루수), 한명진(2루수), 황우겸(3루수), 정진철(유격수), 최광풍(중견수), 문동현(우익수), 윤태섭(좌익수) 등으로 구성된 선수들은 열심히 훈련하였다. 특히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박현덕 감독이 있어 선수들의 기량은 날로 향상되었다. 박현덕 감독은 과묵한 성품으로 큰 소리를 치지 않았지만, 모든 면에 솔선수범하였고,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어서 학생들 모두 군말 없이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이 분들은 모두 초창기 불모지(不毛地)의 환경 속에서 온갖 역경을 오직 은근과 끈기의 성실함으로 동산야구의 씨앗을 싹트게 하고 개화(開花)를 준비하신 선각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