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야구사
인천고는 1차전에서 세광고를 22-0으로 5회 콜드게임승하고, 2차전에서는 대구상고를 6-2로 이기고 결승에 도달했다. 김선웅 감독의 지도 아래 투수로 김일겸과 이기상을 비롯한 1루수 고철호, 유격수 김진영 등 훌륭한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본교의 첫 상대인 경동고는 전년 대회에서 경남고에 패배하였으나 우익수만을 바꾸고 작년 멤버 그대로 출전하여 막강한 실력은 물론 노련한 경기운영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본교는 유격수로 활약하던 신인식을 투수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선수 운용으로 경기에 임하였다.
동산의 선공으로 시작된 게임은 2회 초 공격에서 5번 타자 신인식의 2점 홈런으로 점수를 얻어 여유를 지니게 되었고, 5회초 4번 박하성의 2루타로 1루에 있던 주자를 3루로 보내는 순간, 상대 수비진의 실수를 틈타서 1점을 추가하였고 시합종료 3 : 1로 승리를 장식하였다. 이때부터 신인식은 발군의 실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2회전은 대전고에 8 : 7로 어려운 승리를 차지한 경남고와의 시합이었다. 경남고는 제1회, 제2회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준결승전에서 본교를 침몰시킨 동산야구부 창설 이래 최대의 숙적이었다. 당시 야구부원들은 우승을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선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필승의 각오를 새롭게 하며 이번만은 꼭 이겨야 된다는 신념으로 시합에 임하였다. 결과는 5 : 0 승리. 선수들의 집념이 승리로 나타난 것이었다. 선배들과 야구부원들은 결승전에서 승리한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며 운동장을 환희의 바다로 바꾸어 놓았다.
양군의 투수력을 보면 경남고 선수 김수갑은 충남 대표 대전고와의 시합에 비하여 훨씬 훌륭한 구속과 제구력으로 경기에 임했다. 다만 3회에서 야수의 실수로 일거에 3점을 잃음으로써 치명타를 입었다. 반면 동산고 신인식 선수는 약간 단구였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노련한 게임 운영을 하면서 자신감 있는 공을 던졌다. 이는 우리 편 야수에 대한 커다란 믿음이 있었고, 전 시합에서 얻은 자신감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특히 타력에 있어서 강한 면모를 보인 이 시합은 동산고의 승리가 당연한 결과라고 당시의 신문은 평을 싣고 있다. 확실히 동산은 일취월장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고, 경남고와의 5 : 0 통쾌한 승리는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인천고와 대전하게 된 상황이었기에 우리 선수들은 기쁨에 들떠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경험으로 인천고의 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합 전날 적당한 운동으로 몸을 푼 선수들은 일찍 취침에 들어갔지만, 박현덕 감독은 선수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지켜보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작전계획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에는 ‘인천고에 우승을 양보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사람들의 전화도 걸려오고 있었고, 박현덕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찍 취침시킨 것이었다.
반면, 인천고는 2년 연속 대회우승을 하였고 이제 우승의 문턱에서 결승전 상대로 만만하게 여기는 동향의 동산고를 만났으니 우승은 당연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선전에서 우리에게 완봉승을 거둔 상태였기에 결승전에 우리가 경남고를 이기고 올라오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한 상태였으며, 또 본교의 전력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승전은 6월 5일 일요일. 결승전에 앞서 대회를 더욱 빛내고 흥미롭게 하기 위하여 미 304통신대대 야구팀과 한국육군야구팀과의 친선게임이 벌어져 박진감이 넘치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3시 30분 3연패의 야망을 지닌 인천고는 타순을 정비하고 필승을 기약했고 동산 박현덕 감독은 감독을 맡은 이후 어렵게 잡은 기회를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로 선수들을 준비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들에게 이전의 시합으로 갖게 된 인천고에 대한 패배의식을 잊게 하고 투지와 집념으로 재무장시키는 일이었다.
인천고의 선공으로 시작된 게임. 인천고는 4회 초 공격 때 1사 후 깨끗한 안타로 1루에 있던 주자를 2루로 진출시키고 다음 타자의 통쾌한 3루타로 1점을 선취하여, 인천고 응원단은 승리의 기쁨에 들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투수 신인식 선수는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쾌투를 계속하였고, 투수 공략에 실패한 인천고 타자들은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쫓기는 상태가 되었다. 인천고 투수 이기상은 좌완투수 특유의 인커브로 동산고 타자들을 요령 있게 피해갔지만, 상대 투수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박현덕 감독의 지도를 받은 동산 선수들은 회가 거듭할수록 상대투수의 공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7회말 5번 신인식과 6번 박의양의 안타로 1사 1․3루의 찬스 때 박의양이 2루 도루를 시도, 이를 잡으려던 인천고 포수 한학수의 견제구가 악송구되는 틈에 3루에 있던 신인식이 홈 뛰어들어 극적인 동점을 이루었다. 이후 9회까지는 투수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연장전까지 가게 되었다.
드디어 12회 말, 박의양의 안타로 포문을 연 동산고는 고덕영, 곽인성의 연속 3안타로 1점을 추가하여 제10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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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식 선수는 최우수상과 본루타상을 받았고 타격 10걸에는 박하성, 신인식이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경기도지사 이익홍은 경기스포츠의 우수함을 높이 평가하며 동산야구부를 표창하는 열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주간인천사 편집국장 김응태씨 : “정말 이번 경기야말로 학생만이 가질 수 있는 모범적인 게임이었다. 특히 동산이 청룡기를 획득한 데 찬사를 올린다. 학생운동이란 실력만으로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인식시킨 이 게임은 동산의 앞날의 진전을 암시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인고 측으로 보아서는 섭섭한 얘기지만 양보란 만부당한 말이다. 양보하라는 것은 단연코 스포츠 정신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운동정신에 양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동산의 전통 야구 정신을 기본 삼아 많은 인재가 배출되기를 바라며 훌륭한 정신을 더욱 융성하도록……”
대중일보사부사장 이종윤씨 : “일부 층에서는 동산이 양보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고가 좀 분하기는 하겠지만 그저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위 두 분의 말씀에서와 같이 당시의 상황은 대단한 찬반양론을 낳았고 본교는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본교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던 교직원들과 밴드부 학생들은 우승의 소식을 들은 즉시 트럭을 빌려 밴드부원을 싣고 서울운동장으로 올라가고 남은 교직원은 종이에 동산 우승의 속보를 써서 시내 곳곳 전신주에 붙이는 열성을 보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시상식이 끝나자 밴드부원들을 트럭에 태워서 기쁨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고 야구부원은 뒤 버스에 따라오게 한 채 종로를 거쳐서 조선일보사에 들러 감사의 표시를 전한 후 경인국도를 거쳐 인천 시내로 들어왔다. 경동을 거쳐 배다리 쪽으로 밴드부, 야구부원들이 트럭과 버스에 타고 학생들이 뒤따르며 행진을 하는데 갑자기 주먹만 한 돌들이 날아와서 밴드부원들이 혼비백산 악기를 움켜쥐고 트럭을 재촉하여 도망 나오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이 돌멩이 사건은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주전 선수 명단은 아래와 같다.
투 수 신인식 | 포 수 임준호 | 1루수 이윤영 | 2루수 박의양 | 3루수 고덕영 |
유격수 박하성 | 좌익수 이규정 | 중견수 김완형 | 중견수 곽인성 | 우익수 이길용 |
그 당시 상황을 잘 묘사한 1980년 10월 24일자 조선일보 <야구에 살다> 필자인 김영조의 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55년 제10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동산고 : 인천고의 결승전은 50년대의 잊지 못할 명승부다. 2년 동안 전국 무대를 휩쓸어온 인천고는 3연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신인식이 이끄는 동산고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치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동향의 대결인 결승전은 인천에서조차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 ‘동산고가 전력도 뒤질뿐더러 인천고의 3연패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 좋다’는 측이 있는가 하면 ‘신인식이 만일 일부러 막 던지는 경우엔 가만히 안두겠다’는 측 등으로 흥분이 고조되었다. 이 같은 열기 속에 6월 5일 서울운동장은 1만 5천여 명의 관중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인천고는 연습경기서 일방적으로 이긴 터여서 이날 결승전만은 자신만만했다. 인천고는 이기상 - 한학수, 동산고는 신인식 - 박준호를 각각 ‘배터리’로 내세워 3회까지 득점 없이 나갔다. 그러나 인천고는 4회 초 1사 후 주자를 2루에 두고 6번 김일겸 우중간을 빠지는 통렬한 3루타를 터뜨려 선취점을 올려 관록의 팀임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동산고도 7회 말 5번 신인식과 6번 박의양의 안타로 1사 1․3루의 찬스 때 박의양이 2루 스틸을 시도, 이를 잡으려던 인천고 포수 한학수의 견제구가 악송구되는 틈에 3루에 있던 신인식이 홈 뛰어들어 극적인 타이를 이루었다. 이렇게 되자 운동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으며 서울 관중들은 선린상이 두 번이나 패한 앙갚음을 하려는 듯 모두 동산고를 응원했다. 계속된 동산고의 공격에서 8번 곽인성이 안타성 라이너를 때렸으나 인천고 유격수 김진영이 다이빙하며 잡아내 3루로 뛰던 2루 주자마저 아웃시켜 깨끗이 더블․플레이를 성공시켰다. 이후 두 팀 모두 팽팽한 투수전으로 연장전에 돌입했는데 12회 말 어이없는 폭투로 대승부는 끝나고 말았다. 12회 말 동산고는 1사 후 연속 3안타가 작렬, 또다시 주자를 1․3루에 두었을 때 인천고 투수 이기상의 원바운드로 튀는 폭투가 나와 3루 주자 박의양이 홈인, 동산고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인천고는 이날 지독히 승운이 없어 안타성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등 경기가 풀리지 않아 3연패의 꿈이 무산되고 말았다. 특히 인천고 김선웅 감독은 위기나 찬스 때면 땅을 손톱으로 긁는 습관이 있는데 이날 결승전이 끝났을 땐 열 손가락 손톱 끝에 모두 피가 맺혀 있었다. 1년생 투수 신인식이 투타에서 활약한 동산고는 이후 무적함대로 군림, 전국무대를 휩쓸었다. 동산고는 56년 결승에서 중앙고를 1 : 0으로, 57년 결승에선 또다시 동향의 라이벌인 인천고를 3 : 1로 각각 이겨 처음으로 3연패란 위업을 달성했다. 그래서 동산고는 운보 김기창 화백이 청룡상을 그렸고, 성제 김태석 선생이 명제휘호를 쓴 역사적인 청룡기를 영구히 차지하게 되어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동산고가 청룡기 대회에서 3연패한 기록은 70년대 경북고가 대통령배 대회에서 3연패하기까지 어느 팀도 이룩하지 못한 빛나는 금자탑이었다. 동산고 3연패의 주역은 당연 초고교급 투수 신인식이었다. 1학년 때부터 클린업 트리오로 투타에서 맹활약한 신인식은 불같은 강속구를 뿜어내며 3년 동안 상대팀 타자들을 농락했다. 신은 보통 한 게임에서 평균 15개 정도의 삼진을 뺏어내면서 지금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노히트 노런’도 상당수 수립했다. 신은 투지도 남달리 뛰어나 투수가 잡지 않아도 되는 ‘캐처플라이’나 1루 쪽 플라이까지 달려가 잡아내는 정력적 선수로 팀에 활기를 불어넣곤 했다. 이 당시 신인식 때문에 빛을 못 본 투수들이 많지만 특히 내가 감독으로 있었던 중앙고의 박용호 투수도 그중의 하나다. 박용호는 스피드가 뛰어난 유망한 투수이면서도 중앙고가 동산고에 청룡기를 결승을 비롯하여 세 차례나 1점차로 패하는 바람에 그늘에 가리우고 말았다. 한편 동산고 하면 박현덕 감독(박현식 씨 실형)을 빼놓을 수 없다. 48년에 상업 선생으로 부임, 야구부 감독을 맡은 이래 애로라지 30년 동안 야구부를 이끌다 3년 전 정년퇴직했다. 교육과 야구 지도보다는 이해관계로 옮겨 다니는 요사이 고교야구감독 풍토를 볼 때 귀감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구도인천의 화려한 전성기도 신인식의 졸업으로 급강하, 58년부터 고교야구에는 서울세가 대두, 60년대 후반 경북세가 나올 때까지 주름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