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야구사
창단 9개월 후 1946년 6월 자유신문사 주최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후에 청룡기 야구대회로 개명됨)에 출전한다.
1회전에서 광주사범 불참으로 부전승하고, 2회전에서는 춘천중에 12회 연장 끝에 12-9로 이겼으나, 준준결승전에서 경기중에 10-1로 완패하고 만다. 박현식이라는 괴력의 투수를 선보였지만, 짧은 연습 기간이었고 전국 무대의 벽이 높음을 실감한 첫 출전이었다. 특히, 상대팀이 명문 경기중이기 때문에 학생야구 최초의 라디오중계가 있었던 시합이었다.(인천야구 한 세기 참조)
이때부터 본교는 청룡기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청룡기 우승에 대한 집념이 다른 대회보다 강하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1946년 이 해에는 인천공업중학교(현재 인천기계공고)에서 야구부가 창설되어 인천에서는 본교, 인천상업학교(현재 인천고), 인천공업중학교의 3개 야구팀이 있어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연습경기와 예선전을 치르며 서로 실력을 향상시켜 나갔다.
1947년 자유신문사는 전년도의 출전방식을 바꾸어 예선전을 서울특별시와 팔도로 나누어 실시한 후 대표팀을 선발하고 대표팀끼리 대진하는 방법을 확정지었다. 이에 동산중학교, 인천상업학교, 인천공업중학교, 송도중학교, 개성중학교의 5개 팀이 개성에서 예선전을 실시한 결과 본교가 우승하여 경기도 대표권을 얻고 제2회 대회에 출전하였다. 본선에서 광주사범을 4-3으로 이기고 준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경남중학교에게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1947년 여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국지구대표 중학교야구선수쟁탈전(현재 황금사자기야구대회)에 도대표로 참가하여 군산중을 이기고 준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또 다시 경남중에 지고 말았다. 본교의 박현식과 경남의 장태영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는데, 경남중은 이해 2관왕이 된다.
1948년도에는 박현식이 빠진 가운데(경기중으로 전학) 대성중, 인천공업, 송도중을 차례로 물리치고 경기도대표로 선발되어 제3회 전국중등학교야구대회에 진출한다. 본선 개막전에서 공주중이 불참하여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장태영의 경남중에 12-0으로 패하였다.
1949년 제4회 청룡기 대회 본선에 진출했으나 대구상업에 6-0으로 패하고 만다. 그리고 같은 해 제3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 군산중에 9-4로 승리하고, 박현식을 앞세웠으나 준결승전에서 동래중에 3-0으로 패한다. 당시 선수들은 정진철(6중 2) 황우겸(6중 2) 김정학(6중 3) 문동현(6중 2) 최광풍(6중 2) 조한국(6중 2) 배영복(고1) 전봉학(고1)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