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의 도약(1950년대)
우리 국민이 마음 모두어 숭상하는 곳이 東이니 해가 뜨는 곳이 東이요, 희망이 솟는 곳도 東이고, 절대자가 존재하는 곳도 東이니 신성하고 오묘한 장소를 가리킨다.
東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천지만물이 정기를 받아 영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신비를 지닌 곳이 東이다. 그러므로 그 성질은 동적(動的)이며 상서롭고 영묘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東은 어짊이요, 슬기요, 지혜이며, 으뜸이고, 기준이 되며 바람(希望)이며 밝음이다. 과거 東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元)에 해당한다 함도 이런 연유에 의한 것이다. 東은 스스로 높임을 내포하고 있으니 과거 우리나라를 동국, 동방, 해동이라 칭함도 이러한 까닭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논어』에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 하였으니 山은 어진 사람이 찾는 바요, 그 성질은 東이 動인 반면에 山은 지(止)이며 묵(默)이다. 의젓함이요, 변함이 없음이고, 기운이 왕성함을 의미하고 삶의 터전이요, 자연의 원 모습이 山인 것이다. 動의 기를 받아서 거두어 들여 저축하고, 윤택하게 하며, 선량하게 되도록 한다. 山은 信(믿음)이요, 진리요, 의리이다. 動과 黙의 조화를 이루어 東山이 이루어짐이니 움직이고(動) 멎음(止)은 크게 마음을 모아 활동하며, 몸을 기르고, 정신을 기르고, 남을 기르는 수신(修身), 단련교육(鍛鍊敎育), 훈육(訓育)의 道를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다.
그 기르는 방법이 올바르면 길(吉)한 것이고 그 기르는 방법이 옳지 아니하면 흉(凶)한 것이다. 넘치고 모자람, 길고 짧음, 크고 작음, 많고 적음에 지나침이 없는 중용의 태도가 바로 東이요 山이다.
요약하면 東山은 천둥이 山에 힘을 주어(雷山小過) 윤택하게 하고 굳건하게 하며 의젓하게 하며 슬기와 지혜 그리고 믿음과 진리가 합치어 발전하고 번영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과 받음이 인류사해(人類四海)에 뻗어 나가 떨치어 나타나게 함이 東山이다. 東山은 참된 스승과 어질고 선한 제자가 함께 어우러진 도량(道場)이요, 기쁨과 환희의 낙원이요, 진리를 탐구하며 인재를 육성하며 인류를 거룩하게 한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본교가 개교한 이후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강산은 물론, 사회의 변혁이 극심한 시기였다. 그것도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와는 정 반대로, 탄압과 굴욕을 감내하며 생명의 위기마저 감지하고 살아가야했던 때라고 여겨진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발전시키느라 고심하고 청춘을 불태운 선각자들께서 개교 10주년을 맞는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개교기념일은 원래 7월 14일이지만 더위를 피하여 10월 21일, 기념식 및 공로자표창식을 거행하였다.
학교를 설립하는 데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故 崔承宇, 故劉君星, 金允福, 金世玩, 柳昌浩, 李興善, 李得宇 先生 등에게 설립공로자 표창패를 증정하였고,
동산후원회 공로자 표창에는 박용한선생을, 또 10年 근속 선생님과 직원에 대한 표창이 있은 후 과거 전형적인 일본극장이었던 前 동방극장 앞에 소재한 표관(瓢館)에서 음악회와 예술제를 거행하였다.
다음은 당시 김윤복(金充福)이사장님의 기념사이다.
제1절 학도호국단 결성과 좌·우 혼란기
(1) 학도호국단 결성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는 다시는 나라를 잃고 타국에 의해 지배받는 일이 없도록 호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학교별로 ‘학도호국단’을 결성하도록 하였다.
본교에서는 1949년 2월 19일 소대․중대․대대 체제의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 1949년 2월 26일 인천호국단, 동년 3월 18일 경기도호국단 결단식이 공설운동장에서 수행될 때에는 전교생이 참가하였다.
1949년 4월 22일에는 중앙학도호국단결단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어 본교 학생대표 4명도 배속장교 인솔 하에 참가하였다.
1949년 9월 28일,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학도호국단 규정이 공포되었다.
(2) 교관 배치와 이달성선생
1949년 2월 19일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결성된 학도호국단이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되고 300쪽 분량의 소형책자로 학생들에게 배부된 ‘군사훈련독본’으로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하게 되었다. 초대교관으로서 군사훈련을 담당하도록 배치된 교관은 이달성(李達性) 육군소위와 전상엽(全相燁) 소위였다.
이달성선생은 6·25때 육군에 입대하여 7년간 복무하고 56년 육군소령으로 재대하여 다시 교단에 선 후 1978년 3월 퇴임한다. 6·25때 육군장교로서 선생을 찾아오는 인천지역 학도병들을 인솔하여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 금성화랑무공훈장(54년), 경기도문화상(62년), 대통령표창(78년)을 수상하였고, 퇴임 후 경기도 및 인천시체육회 사무국장(78년)을 역임하는 등 체육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다 81세로 별세하여 2002년 4월 13일(토) 인천시체육회관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3) 혼란 속의 학교
좌우 대립의 혼란기 속에서 가끔 선생님이 출근하지 못하여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 날도 많았고, 당국의 좌경학생들에 대한 적발․취조 등으로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불안과 초조 속에 있었고 제대로 옥석(玉石)이 구별되지 않아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학교장은 경찰서에 구금된 학생을 종종 빼내오기도 하였다. 오후 수업이 잘 안되면 극장 관람이나 연극구경도 자주 했다. 학교에 낯선 사람이 어른거려도 오늘은 누가 연행되는가 걱정을 했고 수업 중 무의식적으로 말 한 마디 사용한 것이 좌(左)도 되고 우(右)도 되니 원한을 품은 사람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부친 사실도 허다한 실정이었다.
타교에 비해 비교적 평온했다고 하나, 작은 불상사는 몇 차례 겪게 된 시기였다. 당시 좌·우 대립의 혼란상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안타깝게도 설립 당시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 지도와 학교 발전에 공헌하셨고, 특히 실력 있는 선생님들께서 본교에 근무하시도록 하여 많은 학생들이 명문대학에 진학하도록 노력하신 제2대 구백서(具百書)교장이 사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1949년 6월 16일부터 서정권 도장학관이 과도기의 교장서리로 근무하다, 동년 10월 5일 전진성선생이 교장으로 취임한다.
한편, 해방 이후 교육의 수요는 급속도로 증가하였으나 학교 수가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어서 본교 또한 학생 수용을 증가하기에 이른다. 곧, 1949년 9월 9일 동산중학교 학칙변경 인가로 수업연한 제1부는 주간으로 6년제 12학급, 제2부는 야간으로 3년제 3학급으로 학생정원은 총 750명으로 증가하였다.
인 가 서
(1) 6․25전쟁과 휴교, 학생들은 전선으로 지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북한공산군은 보병 8개 사단(인민군 19만 8천명)과 전차 2개 사단(소련전차 T34형 242대), 각종 포 2,540문, 전투폭격기 211대, 해군함정 30여 척 등으로 군사적으로 우세함을 자랑하며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을 하니 세계사에 그 유례가 드문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6월 28일 남침한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계속 남하하여 대전이 7월 28일에 함락되고, 8월 중순에는 대구를 총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 학교 행정은 마비되고 자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7일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은 학도대(學徒隊)를 조직하고, 6월 29일에는 수원에서 비상학도대(非常學徒隊), 7월 19일에는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大韓學徒義勇隊)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7월 8일에는 대구역전 광장에서 조병옥(趙炳玉), 신익희(申翼熙), 이범석(李範奭) 등이 시국강연을 열어 학도들에게 피 끓는 조국애를 호소하게 이르고 당시 대학생은 물론 중학생마저도 구국의 일념으로 학도병으로 자원하게 된다. 거리거리의 벽보에는 「조국의 건아여,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조국의 산하에 뿌리자!」라는 구호가 나붙어 있었다.
이때에 본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배움의 터를 잃고 뿔뿔이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부 학생 중 조국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어 일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전선에 뛰어 들기도 하였다.
(2) 교사(校舍)의 징발
전쟁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거리는 피난민으로 줄을 이었고 학교나 쓸 만한 큰 건물은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군대에서 징발해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51년 6월 1일 복교하여 수업을 개시하려는데, 본교는 UN군이 징발하여 사용하고 있어 부득이 인천신흥국민학교 일부를 빌려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으로 이루 형언하기 어렵게 열악한 교육환경이었다.
그러나 교육은 전시에도 중단할 수는 없어 인천시내의 어느 학교보다 먼저 수업을 시작하였으니, 1951년 2월 26일자 문교부가 발표한「전시하 교육특별조치 요강」에 충실하였다.
학도의용대 또는 정규군에 입대한 학생들로 인하여 수업에 복귀한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6․25가 발발하자 학생들은 ‘멸공(滅共)’이란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들고 인천시내를 돌면서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싸우자고 시민들을 격려하고 다녔다. 그리고 수복 후에도 다시 반공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당시 경기도에서는 제2 국민병으로 청년 학생들을 편성하여 동단위로 축현국민학교에 집합시켜 편대를 짰다.
해방 이후 혼란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교육열은 강했고 본교에서도 개교 10주년을 넘기며 학교발전을 향해 박차를 가하던 중 6·25의 날벼락을 맞게 되어 무기한 휴교를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참담하였겠는가? 혼란기에 내일에 대한 희망 없이 좌절해 있는 학생들에게 참된 삶의 의지와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이 절실한 때였다.
1951년 당시 이사장 김윤복(金允福)선생은 인천 경동에 거주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학교문을 열어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기를 갈망하며 교사들의 안부를 수소문하면서 연락을 취하였다. 그 중 가장 빨리 연락이 닿은 분은 장익순(張益淳)선생이었다. 김윤복이사장은 장익순선생을 자택으로 불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니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새로운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 왜냐하면 본교의 교사(校舍)는 UN軍이 임시 차용하고 있어 수업을 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교육장소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장익순선생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휴교가 되자 잠시 몸을 피했다가, 수복 후 먼저 돌아와서 학교에 찾아갔으나 교문이 굳게 닫혀 있고 개학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해군에 입대하여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다행히 해군 인천파견대에 소속되어 인천에서 근무할 수 있었으므로 재단이사장과 연락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일찍 피난길에서 돌아온 장익순선생은 본교가 UN軍에 의하여 징발・사용되었으므로 학교서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졸업대장과 재학생명단과 같은 학생들에 관한 서류, 재단 및 학교에 관한 중대한 서류들의 안전한 보관이 무엇보다 긴급한 사정이었다. 이에 장익순선생은 해군당국에 의뢰하여 차량의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주둔한 UN軍에게 서류의 안전한 보관을 요청하고 연합군과의 협의하여 학교서류 일체를 해군당국에서 지원한 차량을 동원하여 8차에 걸쳐 안전한 장소인 자택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과거의 서류들이 하나도 분실됨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고 이어져 내려 올 수 있었다.
재단이사장의 명을 받은 장익순선생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민학교인 신흥국민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교사를 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의 전시체제라 해군 문관인 장익순선생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교장은 본관 교사 2층과 3층을 동산중학교가 사용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었다.
1951년 5월 말 학생들에게 연락하고 6월 1일을 기하여 신흥국민학교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여 비로소 전시수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교사들도 연락이 닿는 대로 수소문하여 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였으며 수업에 필요한 교구를 준비하느라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피난길에서 돌아온 시민들이 삶에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교육’에서 찾게 되자, 특히 국민학교 학생 교육 수요가 늘게 되었고 자연히 신흥국민학교의 교실 부족난이 대두되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2층을 반환하게 되고 2부제 수업을 하기에 이르렀고,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사동 30번지에 소재한 창고를 임대하여 교실로 개축을 시작하였다. 100여 평이 넘는 넓은 건물이었으므로 교실을 5개 마련할 수 있었다. 1차적 어려움인 교실이 마련되자 2부제 수업을 다시 1부로 환원하였다.
이러한 상황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이 닥쳐왔다. 학생들의 수가 갑자기 늘어났다. 15학급을 10학급으로 편성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10학급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3개 이상의 교실이 더 필요했다. 신흥국민학교 오른쪽 높은 언덕에 소재한 동본원사(東本願寺) 주지스님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본교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이 철수할 때까지 사찰 내에 임시건물을 지어서 얼마간 사용할 수 있도록 선처를 구했다. 주지스님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허락을 얻어 사찰 내에 3개 교실과 교무실 분실 합계 4개 교실을 축조하고 학생들의 복교를 모두 받아들여 수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교사들의 주거난을 해결하고자 본교 교사(校舍) 중에서 연합군이 사용하지 않던 과거 수용소 건물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6개의 주택으로 구분하고 내부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거할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던 교사들의 고충을 조금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밖에도 당시교사들의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다.
신흥국민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또 어떤 날은 동본원사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하고, 어떤 날은 사동 소재 창고를 개축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니 출근하는 곳이 다른 교사도 생겼다.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없어 아무리 추운 때라도 몸으로 이겨 내면서 수업을 진행했고, 교무실에 숯난로를 설치하여 잠시 손을 녹이고 수업에 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재단은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연합군과 교사 반환 교섭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1951년 8월 31일 교육법의 일부개정으로 <6년제 동산중학교>는 동산중학교와 동산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그래서 제2부(야간)에 소속됐던 학생들은 본인의 요망에 따라서 주간으로 편입하거나 타 학교 야간으로 전학을 하게 되어 아쉬움이 있던 시기였다.
제1절 교육시설의 정상화 노력
(1) UN군으로부터 교사(校舍) 반환
1953년, 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가고 사회 각 방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고 있었으나 학교의 교육 환경은 쉽게 개선되거나 안정을 찾지 못한 실정이었다. 특히, UN군이 차용하던 교사(校舍)는 언제 반환이 될지 모르는 상태였고 임시교사를 신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 UN군 총사령관 벤 장군은 1953년 2월 UN군이 사용 중인 각급 학교 교사(校舍)를 빠른 시일 내에 반환하여 교육 본래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언약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재단의 강력한 요구와 본교의 실정을 감안한 UN군은 본교에서도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3년 11월 15일 본 校舍는 UN군으로부터 완전히 인도 받아 말끔히 청소하고 다듬은 후 학생들을 맞이하였다. 1950년 6월부터 약 3년 5개월 동안이나 학교 건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비극적 역사의 모습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는 중등학교 교실 2,430실이 전파되고 2,844실이 반파되는 등 교육환경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는 당시 전체 중등학교 교실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난감한 교육환경을 자력으로 개선하기란 불가능한 실정임을 알고 자유우방국가들이 경제적 원조를 보내 주었다. UNKRA, ICN, AFAK, CAC 등의 원조가 당시 우리나라 교육환경 복구에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특히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對韓 軍事援助)의 원조는 본교의 복구 및 건설에 지대한 효과를 주었으며 본교 발전의 초석이 되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즐거움과 정서함양에 일익을 담당하던 30인조 악기는 6․25 사변으로 인하여 완전히 분실된 채 흔적이 없어졌고, 밴드부 학생들은 각자가 소지하고 있던 악기를 가지고 와서 연습하는 애처로움을 드러냈다. 재단은 이런 학생들의 정성어린 모습을 보고 새로이 150만환으로 24인조 악기를 구입하고 특별히 지도교사를 배려해 주는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24인조 악기로는 완전한 화음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매년 100만환을 보좌여 35인조의 완전한 브라스 밴드부를 조직해 주기로 언약하였다. 침체되어 있던 밴드부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한편 학생들의 정서 함양과 소질 계발에 정성을 쏟아 주었다.
이러한 재단의 아낌없는 도움에 감동한 밴드부 학생들은 교사의 지도 아래 밤 11시까지 연습하는 열성을 보이고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연마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재단의 도움에 보답하였고 행사 때마다 참가하여 동산의 명예를 드높이는 역할을 했다.
(2) 학급 증설과 임시 교사 증축
종전(終戰) 후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교육열은 날로 높아지고 상급학교 진학 희망자의 수는 격증해 나갔다. 문교당국은 진학희망자 적체를 해소하기 위하여 각급 학교에 학급 증설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에 본교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특히 인천시민의 교육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951년에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6학급에서 고등학교는 1954년 4월 3일 8학급 450명으로, 중학교는 1954년 5월 3일 18학급 900명으로 인가를 얻게 되었다.
학급증설로 인하여 장차 12교실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 경제적인 여건 속에서 심각한 건축자재난을 겪던 상황이라 임시적으로 교사를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사택으로 쓰이는 건물 앞쪽에 一字로 7교실을 증축하기로 한 것이었다. 기초만을 콘크리트로 하고 목조로 건물을 지어 나갔다. 물자가 지극히 궁핍하던 시대라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금이 있어도 자재를 구입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UN군이 철수하면서 샤워장이었던 임시건물을 분해하여 가지고 가려 할 때 본교에서 그것을 양도받아 그 자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드디어 1954년 7월 15일 가교사(假校舍) 목조 양철지붕 7교실 140평이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그 후에도 벽을 다시 시멘트 벽돌로 교체하고 지붕을 교체하는 등 공사를 여러 번 하였으나 임시로 지은 건물이기에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1984년 현재 중학교 신관 건물의 기공식이 있기까지 학교 진입로 옆에 자리를 차지하며, 혼란기 역사의 한 단면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교문에서 본관에 이르는 등교길에 플라타너스를 심어 학생들이 항상 푸르름과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교정을 가꾸었다.
(3) 본관 신축과 AFAK(對韓 군사원조)
종전(終戰) 후 진입로 옆에 가교사(假校舍)를 건축함으로써 교실난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으나 특별교실과 교무실 등이 완전하게 구비되지 않아 새로이 본관 신축을 계획하게 된다.
설계도를 작성한 후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對韓 軍事援助)에 물자 협조를 요청하고 1956년에 신축 계획을 세웠으나 공사비가 마련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학교 운동장에 시멘트와 목재 그리고 내장재인 하드보드(Particle Board)가 들어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1955년 9월 12일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기본 자재는 마련되었어도 벽돌과 철근 등과 그 밖의 건축자재 구입비와 인건비 등이 문제였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AFAK의 불신을 사지 않기 위해 자재관리에 매우 신경을 써야 했고, 공사장 인부들에 대한 인건비 지급이 심각한 문제였다. 심지어 당시 교감선생님이 책임을 지고 은행 대출을 통해 급전을 마련해서 인부들의 소요 사태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1956년 2월 18일 내외귀빈 특히 AFAK의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감격적인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총 233평으로 구성된 건물은 외벽을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리고 지하에서 2층을 올릴 때는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받침으로써 공간 활용을 최대로 확보했다.
1층(지하층)의 2개 교실 중 2/3는 시청각실 겸 다목적 교실로 사용하였으며 1/3은 도서실로 사용하였다. 2층은 서무실, 교장실, 재단 사무실로, 3층은 교무실로 사용하였으니, 비로소 완전하고 정상적인 학교로서 시설이 구비되었고 외형적으로도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특징을 든다면, 마치 미국 남부의 전형적 저택을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AFAK의 도움과 당시 선진국 동경의 대상이었던 미국식 건축물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특히, 3층에는 베란다를 만들어 앞의 경치를 조망하고 휴식할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현관에는 계단을 만들어서 장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였다. 창문도 창 위와 아래에 작은 돌을 부수어 콘크리트를 입힌 후 물을 뿜어 씻겨내어 질감을 신비롭게 살리기도 하였다.
준공식 때 AFAK 관계자들은 건물의 우아함과 내부 벽면 처리 등의 독특함에 대해 많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AFAK 원조의 적절하고 유용한 사용으로 인하여 차후 본교의 교사 증축 시에 많은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4) 고등학교 교사(校舍) 신축
본관 신축 이후 고등학교 발전을 위해 중학교와 건물을 분리해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교사신축계획을 수립한다. 당시 동산염전에 대한 추가비용 지출과 가평의 학교림(學校林) 매입 등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학교발전을 위한 계획을 늦출 수 없어 다시 AFAK에 원조를 신청한다.
본관 옆(현재, 강당 옆 고등학교 구관)에 신축 부지를 정하고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AFAK에서 모든 자재를 공급해 주는 것은 아니어서, 벽돌을 만드는 모래는 학교 주변 하천에서 채취하였다. 이것은 모래 구입 및 운반비용 절감 효과도 있었지만, 하천을 정비하여 학교 터전을 확장하려는 이중효과도 있었다. 또한 경비절감을 위해 학생들이 벽돌을 나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니, AFAK와 후원회의 도움과 재단·교직원·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공사를 진행한 것이었다.
드디어 1958년 10월 4일 개교 20주년 기념식과 함께 교실 13개, 건평 445.5평의 고등학교 교사 준공식을 갖게 된다. 학교에서는 AFAK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김찬도, 박영성선생에게 나무로 신축교사 모형을 만들도록 하여 8군사령부에 기증하였다. 곧, 사령부에서는 본교의 건실한 노력을 치하하는 내용과 함께 신축교사모형을 8군 신문에 게재하게 된다.
(5) 강당 건립과 안익태선생 귀국연주회
동산은 학교발전과 학생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사(校舍)의 신축으로 교실난이 타개되자 이제는 좀 더 발전된 교육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일제시대에 건립되어 학생들의 채력단련장으로, 학교의 각종 행사장으로 그 역할을 다 했던 무덕관이 이제는 세월이 흘러 건물이 노후되고 비좁아 새로운 강당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학생들이 모여서 단체 활동을 하거나 평소에 연마한 정서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우선 전국에 산재한 각급 학교의 훌륭한 시설을 관찰․분석하고 전문가의 지도, 조언을 참고하여 새로운 구상에 의한 발전적이고 과학적이며 최첨단의 설계를 하였다. 특히 음악발표회에 중점을 두어서 음향의 흐름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하였다.
그 결과 벽면에 자연적인 굴곡처리를 하여 자연적인 음의 흐름을 유도하고, 반향음에 대한 음질의 파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시설을 하도록 하였으며, 음의 흩어짐과 모아짐이 일정함을 이루도록 집중적 분석을 하여 천정의 모습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또한 무대의 넓이 및 장치, 조명시설, 준비실, 암막장치 등 완벽한 시설로 가장 훌륭한 건물이 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의자에 대해서는 인천시내에서 유일하게 1인용 철재 개인의자를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강당 표면의 경사도를 적절히 활용하여 관객의 흐름과 시야의 넓이 등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여 모든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재단은 AFAK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건축비 절감을 위하여 공사를 직접 담당하기로 하였다. 1959년 11월 21일 희망의 첫 삽을 뜬 강당기공식을 한 후 해를 넘기며 완공을 향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하천에서 모래를 채취하여 시멘트 벽돌을 만드느라 서무과 직원은 얼굴이 검게 그을렸고 학생들도 벽돌을 나르는 데 가끔 동원되었지만, 모두들 큰 불평 없이 기꺼이 봉사하였다.
드디어 1961년 4월 10일 건평 350평, 1층 좌석 800석, 2층 150석, 합계 950석의 웅장한 모습을 갖춘 강당은 인천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완벽한 시설을 완비한 강당으로 완공을 하였다. 본교 강당의 준공으로 문화공간이 없던 인천에서 문학제, 연극제, 음악제 등 차원 높은 예술 행사 들이 열리게 되었으며, 본교 강당은 문화·예술인들이 찾아와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특히,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이 귀국하였을 때, 인천시음악협회 서후덕회장의 초청으로 1961년 5월 24일 본교 강당에서 인천시향 단원들과 함께 강당 낙성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경기도예총과 인천시음악협회의 도움도 있었는데, 음악회는 대성황을 이루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대만원이었으며 시민의 환호는 열렬하였다. 주야 2회를 연주한 음악회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Korea Fantasy와 Beethoven 교향곡 5번 등 여러 곡이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날 때 애국가를 안익태 선생이 직접 지휘하자 온 청중이 기립·합창하여 큰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음악회는 인천문화시민을 열광시키고 자질을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학교 시설의 공익적 사용은 물론, 학교의 사회적 의미를 진실하게 전파시키며 시민 정서순화에 일익을 담당하는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본교생들은 특별활동으로 연마한 독특한 자질을 발휘하는 음악제, 연극제 등을 실연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됨으로써 1인 1기 교육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한 사회적 적응도가 활발해지고 저명한 예술인을 배출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으며 안익태 선생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김자경·장보원 교수 등이 본 강당에서 기량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6) 종전 후 연도별 학교 현황
종전(終戰) 후 1953년 11월 본교사로 복귀한 후부터 7년여 동안 실로 한시도 안주(安住)해 있지 않고, 학교 발전과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힘차게 달려온 시기였다. <동산 80년사>에서 어느 한 때인들 소중하지 않은 경우가 없겠지만,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면서 이루어 낸 50년대의 발전상을 보면, 이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노고에 머리를 저절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 고생하셨던 모든 분들의 공덕을 기리며 ‘1950년대 학급·학생수 인가 및 시설확충 현황’과 <학교 평면도>를 게재한다.
‘1950년대 학급·학생수 인가 및 시설확충 현황
<학교 평면도>
교육열은 도시와 농촌의 구별이 없었다. 그 결과 전국의 군 단위는 물론 면단위에 학교가 세워졌다. 특히 면단위에는 정규학교가 여의치 못한 경우에는 주민들의 힘으로 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등공민학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오래 가지 못하고 폐쇄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영종도의 주민들이 설립한 영종고등공민학교가 그랬다. 섬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중학교 때부터 인천시내로 보내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기에 중학교 교육을 위한 고등공민학교를 만들어 운영을 하였는데, 재정난은 물론이고 특히, 인접한 인천시내의 학생들과 학력차이가 심했다.
이에 주민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처음에는 중등공민학교를 폐쇄하고 정규 일반 중학교를 유치하는 방법을 구상했으나 고등공민학교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이에 주민 대표자들과 영종고등공민학교 관계자들이 본교 재단을 찾아와 영종고등공민학교를 동산중학교에 위탁하여 교육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본교 발전을 위해 건물 증축 등으로 재단의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영종도 주민들의 교육욕구 해소를 위한 소명의식을 갖고, 영종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1954년 7월, 부천군 영종면 중산리(현, 인천시 중구 남디로92, 운남동) 소재 영종고등공민학교는 동산중학교 영종분교로 개명하여 매 학년 1학급씩 3학급 150명으로 분교가 설립된 것이다. 동년 7월 7일 남녀공학인 동산중학교 영종분교 개교식 및 입학식이 거행되고, 본교에서 파견된 교사들에 의해 수업이 실시되었다.
당시 柳承烈(國語), 洪益煥(國語, 漢文), 皮應五(英語), 文松錄(生物), 洪榮喆(公民), 李麟宰(社會), 徐龍雲(科學), 朴政榮(社會), 金泳希(音樂, 家事), 梁 玩(科學, 英語), 田東昊(庶務)선생님들이 영종분교에 파견되어 수업을 하였다.
영종분교로 인하여 영종주민들과 학생들에게는 큰 기쁨이었으나, 100여 명이 조금 넘는 학생들의 수업료로는 학교 운영비도 감당하지 못해 교직원의 월급을 모두 재단에서 지출하게 되어 재단의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었다. 영종은 도서지역으로 교통에 어려움이 컸던 만큼 물자공급이나 근무 여건 등에서도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955년 신학기에 이르러 재단은 영종분교의 교육적, 재정적인 모든 면에서 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 자립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종분교를 설치한 목적은 학교를 설립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섬 주민들 자녀교육을 위한 순수한 교육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분교를 그대로 유지․경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재단은 경기도 교육당국과 협의하여 본래 영종주민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를 독립시켜 유지할 수 있는 대책을 모색하였다. 도당국은 본 재단의 노력과 도움에 감사하며 빠른 시일 내에 최선의 길로 영종분교를 독립시킬 수 있도록 행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955년 7월 15일, 영종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고 동산중학교 영종분교로 전환 승격시켜 1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영종분교 폐교에 따른 기본재산처분 인가신청서가 당국의 허락을 얻어 영종분교는 공립 영종중학교로 새롭게 탄생한다. 현재 인천국제공항에 인접하여 신도시 명문학교로 발전 중인 영종중학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본교 재단의 순수하고 숭고한 육영정신이 서려 있다.
1953년 3월에 문교부 안에 구성된 교육과정심의회는 초ㆍ중등교육 전반에 걸쳐 교육과정의 기본 방침을 수립함은 물론 교수요목의 제정과 시간배당 기준의 제시 등으로 교과서 개편의 기본이 되는 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4월 20일 국민학교, 사범학교 등과 함께 중학교ㆍ고등학교의 「교육과정 시간배당 기준」이 공포되고 이어서 1955년 8월 1일 교과과정이 문교부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전의 교과서는 임시용으로 편찬한 것으로 「전시독본」과 같이 戰時敎材로서의 특수성을 가졌다. 그러므로 1955년 연차적으로 교과서를 개편하여 발행하게 되었다. 학사일정표를 보면 학교교육이 정상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기 지역의 우수한 사학으로 발돋움하던 동산은 어려운 시절에서도 여타의 학교보다도 먼저 학생들의 종합 문예지인 교지 『동산』을 발행하여 명문으로서의 전통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5 동란으로 인하여 그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학교가 안정되고 발전을 하면서 문예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헌신적인 노력과 여러 선생님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1955년 3월 10일 통권 제4호인 교지 『동산』을 속간할 수 있었다.
이정태(李鼎泰)교사의 지도로 문예부에서 주관하여 편집·발간된 교지 제 4호는 총 132쪽으로 되어 있고 인천 소년형무소 明新會 인쇄부에서 인쇄하였다.
다음은 교지 4, 5호의 내용이다.
<교지 4호>
<교지 5호>
1958년 개교 20주년을 맞이하여 본교는 신축 교사 낙성식과 때를 맞추어 10월 4일 문교부 장관, 도지사 들 내외 귀빈을 모시고 대운동장에서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기념행사로는 신축교사 낙성식과 학생 작품 전시회를 가졌으며 10월 4일부터 10월 6일까지 본교 주최로 전인천 국민학교야구대회와 육상대회가 거행되었다.
또한 본교에서 10년간 근속하신 이양재, 석진목 교사에게 김은하 동창회장의 감사장, 기념품 전달과 동산육영회 김종섭 이사장의 표창이 있었다.
지금까지 1950년대를 살펴보면 전쟁의 와중에서 차츰 안정을 찾으며 청룡기 야구 3연패의 위업을 이룩하는 등 동산의 명예를 전국에 드날린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은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초대장 문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