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의 탄생

  • 제1장 태동기 1938.

    제1절 시대적 배경과 건학이념

     

      역사적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독자적으로 발생하거나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대체로 그것을 발생하도록 동인(動因)이 된 것과 또 그로 인해 파생된 또 다른 결과물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또는 업적)을 고찰하려면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족사학 ‘동산’이 개교하던 1930년대는 일제가 대륙침략과 우리민족 말살정책을 본격화한 시기다. 1931년 만주점령, 1937년 7·7사변(노구교 사건)으로 중국과 전면전을 유발한 일제는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우리나라를 자기네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도구로 삼으려고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즉, 일제는 한반도에 군대와 경찰을 증강하고, 민족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는 악법까지 만드는 등 우리의 민족 운동을 봉쇄하기 위하여 전시 통제를 강화하였다.

     

      신사참배, 황궁 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외우기 등을 강요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또, 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에서 조선어과목을 폐지하고, 우리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여 학교의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하도록 하고, 관공서는 물론 집안에서까지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9년 급기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과 일본 역사의 뿌리가 같고 조상이 하나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통해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하였고, 1940년에 일상생활에서도 ‘국어(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던 일제는 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만 남겨 두고 한글로 발행되던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폐간시켰다.

     

      그리고 1937년에 육군지원병제를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청장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근로보국대를 조직하여 군사 시설 및 중공업에 강제동원하였다. 1938년에는 방공협회, 1940년에는 국민총력연맹을 만들고 행정단위마다 애국단과 경방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사의 색출과 전쟁수행에 급급하였으며 말기에는 각 가정의 금속기물까지 강제로 공출케 하였다.

     

      그 당시 학교들의 유형을 보면, 일제당국에 의해 설립된 공립계 학교 또는 실업계 학교,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종교계 학교, 우리 민족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사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록수(常綠樹)의 푸르름이 추운 겨울에 가치가 있고, 동백(冬柏)과 매화(梅花)또한 추운 날씨에 꽃 피우기에 품위가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동산」의 설립은 바로 일제 말기 정말로 숨 쉬기조차 힘들었던 동토(凍土)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던 것이다. 동산의 교정에 세워져 있는 「개교 30주년 기념비」에 담겨 있는 내용으로 본교의 건학이념(建學理念)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여기 멀리 일본 통치 때부터 이 학교를 세우고 도우신 임들은 민족혼을 찾는 것만이 겨레를 사랑하는 길인 줄 아셨노라. 우리도 이 얼을 거울 삼아 겨레의 횃불이 되련다."

  • 제2절 인천상업강습회 1938.07

    (1) 김영배선생, 유창호선생, 구백서선생의 만남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및 상해 Saint John Collage를 졸업하고 답동에 소재한 중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김영배(金英培)선생은 무덕관(武德館)의 관장 겸 사범이었던 유창호(柳昌浩)선생, 그리고 일본 동경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황해도 재령에 소재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부임예정이었던 구백서(具百書)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영배선생은 당시 청소년이 우리 민족의 영원한 밑거름이요 기둥임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심어 주고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 주어, 영원한 민족정기를 지닌 순수한 한국인으로 키워나갈 것인가 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즉 청소년이 조국광복과 독립의 기틀임을 너무나 잘 인식하여, 청소년의 선도와 교육에 대한 지대한 뜻과 염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 으로,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참된 진리를 심어 주어 조국의 영원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자각했던 것이다.

     

      또, 유창호선생은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조상의 얼을 일깨우고 참된 삶의 의미를 찾게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으로 무덕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한편, 명신학교(明新學校)에 부임 예정이었던 구백서(具百書)선생이 마침 김영배선생을 찾아갔다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으니. “우리도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요 참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니, 학교를 설립하여 국가의 미래와 조국독립에 일익을 담당하는 자세를 갖자”는 것이 그 요지였고, 서로의 마음이 하나임을 깨닫고 식민지 조선의 앞날을 위하여 썩어가는 밀알이 되고자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세 분이 인천시 율목동 239번지 소재 무덕관(현, 기독병원 옆)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청소년의 교육과 발전 그리고 미래의 희망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흉금을 털어 놓고 대화를 하며, 학교를 설립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터전을 마련해줌으로써 희망 있는 삶을 갖도록 해주고, 나아가 식민지 민족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2) 인천상업강습회 개소

      학교가 설립되려면 교실(건물)과 교사(敎師)가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자명한 것인데, 이는 당시의 여건으로는 참으로 무모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구백서선생이 영어를 가르칠 수 있으므로 교사(敎師)의 여건에 합당하고, 장차 국제정세로 보거나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영어가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우선 영어를 중심으로 교육할 수 있는 학술강습소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주간 강습소는 인가상 어려움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던 청소년들이 주간에 공부할 수 없는 여건임을 감안하여 야간 강습소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물론 장차 정규학교로 발전시키기 위한 임무를 분담하기로 하고 김영배선생은 섭외(涉外)를, 구백서선생은 교무(敎務)를, 유창호선생은 훈육(訓育)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영어를 중심으로 교육하는 야간 강습소 개설을 청원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미국과의 미묘한 관계 및 사회적 정치적 이유에서 어려움이 있어,

      강습소의 명칭을 인천상업강습소(仁川商業講習所)로 변경하여 김영배선생 명의(名儀)로 주간 강습소 설립허가서를 제출하였고,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드디어 1938년 7월 14일, 인천시 율목동 239 번지 유창호선생인 경영하던 무덕관 2층을 빌려 「인천상업강습소」가 개소되었다.

      이렇게 하여 동산중·고등학교의 요람이 탄생된 것이다. 당시 교직원으로는 원장에 김영배(중국어 담당)선생, 교무 구백서(영어 담당)선생, 훈육 유창호(훈육 담당)선생이었다..

     

    (3) 교육목표와 수업연한, 교과목

      지금의 기독병원(중구 답동로 30번길 10) 옆 율목동 239번지에 자리 잡은 낡은 건물, 유도를 교습하던 무덕관(武德館)을 빌어 개소하였으니, 교실이라기보다는 허름한 창고와 같았고 책상이나 칠판도 완전히 구비된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민족의 앞날이 청소년들에게 있다는 일념으로 이분들은 원생들에게 온 정열을 쏟았던 것이다. 교사는 강의시간마다 원생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민족정기를 불어 넣는 데 소명을 다했고, 원생들은 참된 진리 탐구에 즐거워했다.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건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강인한 체력을 기르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고, 강력한 독립정신을 배양하려 하였다.

      1938년 개소 당시는 3년 수학연한의 학교로서, 교과목으로는 수신(修身)․조선어․일본어․일본사․산술․지리․이과․직업․도서․창가․체조 등이 있었다. 일제가 당시 교육을 전시(戰時)요원 양성을 위한 한 방편으로 여기었으나, 동산의 설립자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4) 정규학교 승격을 위한 노력

      인천상업강습회의 허가를 얻은 선생들은 다시 한 단계 높은 「인천상업전수강습회」로 승격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여 1938년 11월 29일 인가를 받는다. 그리고 정규학교로 승격시켜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보다 좋은 시설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방안을 밤낮으로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중추원참의, 인천부의회의원, 경기도도직원을 역임하고 인천계림자선회 회장으로 있던 인천의 유지, 김윤복(金允福) 선생을 방문하여 인천상업전수강습회가 갑종학교로 승격되도록 합심할 것을 청하여 동지가 되도록 한다.

      이어서 뜻을 함께 하는 민족의 선각자들을 계속 영입한다. 경성법정학교를 거치고 경성용강기선주식회사 대표취췌역사장, 삼신운수주식회사대표, 인천시의회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경제적인 기반을 확고히 다진 김종섭(金鍾燮)선생,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원속성과를 거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지청,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판사로 있다가 변호사로 개업하여 민족의 설움을 대변하던 김세완(金世玩)선생, 그리고 지역유지이며 실업가인 유군성(劉君星)선생, 이흥선(李興善)선생 등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경제력이 있는 분, 덕망이 있고 법률적 지식을 갖춘 분 등 당시 인천 사회에서 존경받던 선각자들께서 뜻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39년초에 이르러 김윤복(金允福), 김종섭(金鍾燮), 김세완(金世玩), 유군성(劉君星), 이흥선(李興善) 선생들이 힘을 모아 「인천상업학교」인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상 외로 다른 곳에서 반발이 나왔다.

      당시 인천공립상업학교 교장으로 있던 목촌씨(木村氏)가 적극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고 나섰다. 갑종학교로서 주로 일본인을 교육하던 인천공립상업학교와 명칭이 비슷하여 혼란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이면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환경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얄팍한 우월감이 나타나 있던 것이었다. 목촌씨의 적극적이며 강압적인 압력을 받은 당국은 인천상업학교의 설립인가신청서를 반려하였다.

      이에 설립위원들은 민족적 설움과 굴욕을 참으며 교명을 「인천상업전수학교」라 하여 전수(專修)라는 2字를 삽입하고 갑종학교가 아닌 을종학교인 수업연한 3년제의 학교설립인가신청서를 다시 제출하였다.

     

  • 제3절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 1939.02.24

     

    (1) 인천상업전수학교 개교식

     

    (2) 교지(校地) 마련을 위한 노력

     

    (3) 교사 신축과 67人의 성금

     

    (4) 학교경영과 무도장 건립

     

     

  • 제2장 재단구성과 학교운영 1941.01

    제1절 설립자들의 숭고한 뜻

     

      교사(校舍)를 신축한 설립자들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였다. 재정적 어려움 없이 학교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마련하고, 을종학교를 갑종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발판으로서 재단법인의 구성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특히 일제가 사립학교에 대하여 단기간 내에 재단법인을 조직할 것을 명령하고 이에 응하지 않거나 부실한 학교는 폐쇄한다고 경고하였다. 물론 이것은 사립학교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단체의 학교나 민족주의적 사립학교를 ‘재정부실’이라는 명분으로 폐쇄하려는 데 의도가 있었다. 단기간 내에 재단을 조직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꾸민 계책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폐쇄되는 비운을 겪었다. 조선의 독립의지를 꺾고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영구집권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인들을 문맹(文盲) 상태로 있게 하려는 것이 속셈이었을 것이다. 설령 재단형성이 되었어도 부실하다는 핑계로 준 공립화 하기도 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설립자들은 유창호선생의 소개로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고 있던, 지주이며 사업가인 최승우(崔承宇)선생을 찾아 재단설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하고 교육사업에 참여할 것을 청한다. 당시 최승우선생은 재력을 바탕으로 재단을 인수하거나 설립을 하여 서울에서의 육영사업을 구상중이었다. 인천이라는 지역성으로 처음에는 망설임을 보였으나, 최승우선생의 출생지가 인천이고 사업의 터전이 인천이었으며 설립자들의 잦은 방문과 설득으로 육영사업지를 인천으로 하기로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1941년 1월 민족교육에의 소명감과 긍지를 갖고 최승우선생은 자신의 전재산을 재단법인 설립에 투입하기에 이른다. 식민지 조선의 교육입국과 민족자존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김윤복(金允福), 김종섭(金鍾燮), 김세완(金世玩), 유군성(劉君星), 이흥선(李興善), 김영배(金英培)선생 등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자들은 최승우선생의 육영사업의지를 북돋우어 대승적인 학교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혼신의 노력으로 일구어 낸 인천상업전수학교에 속하는 모든 재산과 재단법인 및 정규학교 설립에 관한 일체의 행위를 양도하기로 하였다.

     

      1938년 7월 14일 율목동 무덕관을 빌려 개교하고, 1940년 10월 25일 송림동 47번지에 신축교사를 준공하여 학교의 기틀은 마련하였으나 재단설립이 여의치 않았기에 사학으로서 학교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민족사학의 설립과 발전을 위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나아가 민족애·조국애의 참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내가 학교의 설립자’라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벗어나 민족과 조국의 장래를 내다보는 참되고 거룩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직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심어주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순수한 열정이 표출된 것이다. 가르침을 통하여 주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정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고자 했던 설립자들의 이념이 그대로 밀알이 된 것이다. 1941年 3月 10日 설립자들이 양도증을 작성하고 일체의 권한을 양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2절 초대 이사장 최승우(崔承宇)선생 1941.03.10

      1941년 3월 10일 명실상부한 재단의 설립자가 된 최승우(崔承宇)선생은 구 설립자들로부터 인천상업전수학교에 속하는 재산(동산, 부동산) 일체와 재단법인 설립 및 상업학교 설립에 관한 일체의 행위를 양도받았다.

      그리고 동년 4월 1일 초대이사장에 취임하고, 9월 20일 설립자 변경 인가신청을 경기도지사에게 제출한다.

     

          구설립자 ○ 김윤복 ○ 이흥선 ○ 유군성 ○ 김세완 ○ 김종섭

          신설립자 ○ 최승우

     

      이어서 10월 20일 재단법인 인천실업학원의 재산목록(최승우 이사장의 기부증서)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산총액 404,615원

         토지총면적 279,489평(교지 3,000평 포함)

         건물총면적 485평(교사 346평 포함)

     

      1941년 11월 20일, 구 설립당초의 재산과 신 설립자 최승우 선생의 기증토지 276,489평, 건물 139평을 기본으로 하여 재단법인 인천실업학원 설립인가 신청을 하여 학교발전의 기반이 다져지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1941년 11월 21일) 재단설립인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신교사 낙성식을 하게 된다.

     

  • 제3절 제1회 졸업식 1942.03.07

     

    1942년 3월 7일 송림동 47번지의 신축교사에서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된다. 1939년 4월 1일 율목동 소재 무덕관에서 개교와 함께 입학한 120명 중 105명이 졸업했다.

      졸업생들이 이수한 교과목은 수신․조선어․일본어․일본사․산술․지리․이과․직업․도서․창가 등으로 각 과목 배당점수는 10점이었으며, 3년 과정을 마친 것이다.

     

  • 제4절 학칙 1944.

  • 제5절 學校現況 1944.03

  • 제6절 전시교육령과 인천공업전수학교 1944.05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전쟁수행을 위해 ‘결전교육’이라 하여 중등학교의 남자 문과계 학교와 상업학교는 농업학교 또는 공업학교로 전환시켰다. 공업학교는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항공기과․금속공업과․조선(造船)과 등을 설치했다.

        또 전문학교도 법문과는 종합 정리안을 만들고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합해서 경성전문학교로 만들었다.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는 공업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경성척식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또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는 농업지도원 양성소로 변했다.

        사립전문학교에 대해서도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학교재산을 마음대로 수탈하고 조선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고 일본인 시학관과 교장을 내려 보내는 한편 학교명을 고쳤다.

     

        본교 또한 일제말 전시비상조치(戰時非常措置)에 의해 1944년 5월 5일, 인천공업전수학교로 개편 인가를 받게 되니, 이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교육을 전쟁의 도구로 여긴 조치였다.

        1943년부터 토요일과 일요일도 빼앗겨 1주일을 「月月火水木金金」이라고 하여 토요일 오후도 쉴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44년 8월 22일에는 학도동원령(學徒動員令)을 공포하고 학도보국대를 편성하여 학도의 노동력 착취에 혈안을 보였다. 1945년 5월 21일 발표된 ‘전시교육령’은 곧 ‘학도전투비상동원령’으로서 학생을 재학중이라도 전쟁터로 끌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시교육령>

     

     

  • 제7절 일제시대 학교교육 및 사학(私學)의 수난 1945.

    태평양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됨에 따라 일제는 일본화교육을 격화시키는 한편, 사학을 극도로 탄압했다. 특히 적대국인 미국 선교계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가혹했다.

    일인화정책의 강화에 의해 각 학교에 소위 칙어봉안소(勅語奉安所) 설치 강요, 조선어 사용 금지, 황국신민서사 강요, 교사와 학생의 사상 및 언행감시, 한인교사의 축출과 일인의 지도권 장악, 학생들의 강제노역 동원, 군사훈련의 강화, 재단법인 조직 강요, 사립학교설치 불허 등 학교교육과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1) 학생활동의 규제와 사학의 수난

     

    (2) 사립학교 설립 불허

     

    (3) 한국인교사의 축출과 한국어 사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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