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과 희망(1980~98년)
(1) 고등학교 평준화 초기 학교 이미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에 의해 1975년 입학생부터 인천지역의 인문계고등학교는 학력수준이 동일한 학생들을 배정받아 가르치게 된다.
당시 인천지역의 동일한 추첨대상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로서는 공립으로 3개교(제물포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 동인천고등학교), 사립으로 6개교(본교, 대건고등학교, 송도고등학교, 광성고등학교, 인하사대부속고등학교, 선인고등학교)가 있었다.
평준화 이전에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온, 학교 선호도와 입시 커트라인에 의한 수준으로만 본다면 본교에 배정받은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자신(또는 자식)의 학력 수준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학교를 알고자 할 때, 우선 ‘그 학교는 서울대 몇 명 가요?’라고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신의 성적과는 무관하게 그 학교의 진학 성적이 곧 자신(또는 자식)의 진학 결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등학교는 서울대 한명밖에 못 갔대!’라고 하면, 극단적으로 전교에서 1등을 해야만 서울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등학교는 서울대에 30명 갔대!’하면 30등 안에 들면 무조건 서울대에 진학(그것도 인기학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평준화 이후 매년 우수대학에 많은 합격자를 내면서 학교 이미지가 제고되기 전까지 한동안 이미지 개선을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해 왔다고 본다.
(2) 교사·학부모가 합심한 입시교육
《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得天下英才 而敎育之)’이라 했거니와 교사의 가장 큰 보람 중의 하나가 바로 ‘훌륭한 제자’를 배출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여기서 ‘훌륭한 제자’란 무엇일까? 재학 중에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관심을 끌지 못하였는데, 졸업 후 사회에서 성공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된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있을 것이다.
또, ‘훌륭하게’ 되는 것과 학력수준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학창시절에 두뇌가 명석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대체로 사회적 지위와 부(富)를 창출할 확률이 많을 것이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대부분 사람들이 선망하는 가치가 아닌가?
1980년대는 보릿고개와 전쟁을 경험한 부모세대들이 허리띠 조르고 근검절약해서 이루어 놓은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자식들을 ‘가르치려는’ 분위기가 고조된 시기라고 본다. ‘나는 네 할아버지가 가난해서 공부를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힘들게 살아 왔다. 그동안 고생해서 이만큼 먹고 살만하게 집안을 일으켰다. 그런데 못 배운 것이 한(恨)이다. 배웠으면 이 고생 하지 않는다. 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 졸업시키고 원하면 유학까지 보내 준다. 무조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 공부해서 출세하면 너 좋은 일이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학부모님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런 학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입시교육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75학년도 <학교경영계획서> 표지 상단에도 ‘학력 향상의 해’라고 슬로건이 적혀 있는데, 1980년대는 특히 ‘학력향상’, ‘명문대 진학’을 외치며 입시교육에 전념했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3) 고등학교 학급 증설과 교육환경 개선
중학교는 1959년 24학급(1200명)에서 1964년에 30학급(1,800명)을 정점으로 1974년12월 24학급(1680명), 1979년2월 27학급(1890명), 1987년2월 24학급으로 되어 1980년대를 지나며 오히려 학급수가 감축되고 있다.
이에 비해 고등학교는 1955년3월 12학급(600명), 1973년12월 18학급(1,080명), 1980년11월 24학급(1,440명), 1985년10월 30학급(1,740명)으로 되는 과정을 보면, 1980년대 중반에 학급수가 현재와 같은 30학급으로 증설되면서 학생수도 가장 많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교실 증축도 뒷받침 되고 교육환경도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당시는 현재에 비하면 재단의 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 힘겹게 시설개선을 해야만 했다. 한 가지 학교발전을 위해 다행스러웠던 점은 1978년 6월 이득우 이사장님의 후임으로 취임하신 제8대 김찬삼 이사장님께서 1980년 8월 3억원(토지, 가옥) 기부채납 결의를 하시고 1987년 8월에 이르기까지 약정금을 완결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대 교육시설개선 사업을 보면, 1980년 4월 과학관 4층(현재 중학교 본관) 100평이 준공되었고, 1984년 신축교사 20실이 기공되어 1985년9월 준공되기에 이른다. 비록 지금은 낙후되어 점차 애물단지가 되어 가고 있지만, 당시 이 건물의 준공으로 고등학교 30학급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학교 시설배치도를 소개한다.
1) 1980년대 초반 시설배치도(1981년 교육계획서 수록분)
교육과정이란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국가가 기준을 정해 놓은 틀이다. 1955년 1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이후 여섯 번의 전면 개정 과정을 거쳐 2002년 신입생부터 7차 교육과정이 시행ㆍ적용 중이다. 교육부 규정과 시교육청 지침에 의해 결정되는데, 7차 교육과정에서는 ‘만들어 가는 교육과정’이라 하여 학교에서 관리자나 업무담당자 몇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 고착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교사·학생·학부모 등)의 의견을 수렴하여 편성·운영하고 평가 결과에 의해 환류한다. 교육과정의 편성에서 가장 고려되는 것은 수요자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대학입시에 효율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차례의 설문과 희망조사, 입시제도에 대한 정확한 분석 등이 우선 요구되며 교사의 수급, 교육시설 등도 고려한다. 물론 교육부나 교육청의 지침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약성이 있지만, 7차 이후에는 단위 학교의 재량성이 많이 확보되었다.
본교는 특히, 1990년대의 6차 교육과정의 운영과 7차 교육과정 대비 과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96년 12월에 교육활동 우수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교육계획서 공모에서 전국 2위에 입상하였다. 교육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교육과정의 변천과정을 개괄적으로 기술한다.
교육활동 우수 교육부장관상(1996) |
환경교육 우수 교육감상(1998) |
(1) 제3차 교육과정기(1974~1981)
(2) 제4차 교육과정기(1982~1988)
(3) 제5차 교육과정기(1988~1992)
(4) 제6차 교육 과정기(1992~1998)
(5) 제7차 교육과정기(2002년 이후)
(1) 재단과 관리자의 의지
1975년부터 평준화에 의해 예년보다 상위권 학생들이 증가한 점은 바람직한 일이나, 학교간 경쟁은 점차 치열해져갔고 입시 결과가 상대적으로 타교에 비해 좋지 않으면 자연 학부모들의 불만이 표출될 것이 예상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학력향상에 매진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보여진다.
(2) 야간자율학습, 열람실과 합숙소, 심화반
다음은 당시 교육계획서에 명시되어 있는 학력향상을 위한 세부 사업명인데, 야간자율학습 실시, 열람실과 합숙소 설치, 심화반 운영 사항을 알 수 있다. 즉, 1986년 교육계획에 우수 학생 지도를 위한 획기적인 방법들이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85년에 실험과정을 거쳐 1986년에 정착된 사업들로서 학력경시대회, 도서실 24시간 운영, 특별실(합숙소) 운영, 심화학습반 운영 등이 있다.
(3) 기초 교육의 충실
우수 학생 관리뿐만 아니라, 넓게는 기초교육을 충실하게 하는 일련의 교육활동이 적극 시행되기도 하였다.
(1) 생활 외국어 경연대회 - 영어 말하기 대회, 경연대회, 영어 촌극대회
(2) 자기 표현 기회 확대 - 웅변대회, 교내 백일장, 교내 예술제
(3) 독서·작문지도 - 학년별 필독도서 선정, 월 1권 이상 읽기지도, 독후감 쓰기 표창, 독후감 발표 대회, 학급문고 운영
또한, 교직원들의 업무 경감책으로 성적 처리의 완전 전산화, 복사기의 추가 구입을 통한 업무의 능률성 제고, 숙직 전담제 실시, 학교 도서실 비치 도서의 다량 확보, 시청각 교재의 다량 확보를 통한 학습능률 제고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4) 대학진학의 단면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1975년 입학생(27회)부터 평준화로 배정되어 예전보다 입학생들의 학력수준이 나아졌고, 학교에서도 더욱 학력향상에 매진한 결과 해마다 우수한 대학진학성적을 보였다.
대학진학의 단면을 31회 졸업식(1982년 2월 11일) 학사보고 내용 중 <졸업생 진학사항>을 보면, 졸업 대상자 360명중 179명이 4년제 대학에 합격했는데,
주요 대학별로 보면 서울대 9명, 연세대 12명, 고려대 9명, 서강대 1명, 한양대 22명, 성균관대 3명, 중앙대 7명, 인하대 51명으로 나타나 있다.
<論語>에 이르기를 ‘學問은 如逆水行舟하여 不進則退(학문은 여역수행주하여 부진즉퇴)’라 했다. 곧, 학문은 마치 물을 거슬러 나아가는 배와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곧 뒤로 물러나고 만다는 뜻인데, 쉼 없이 정진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대로’가 아니라 ‘퇴보’라는데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다.
학교도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조직으로서 시설, 학력 전반에서 나아지려는 노력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한 시기인들 노력하지 않은 때가 없지 않았겠지만,
개교 50주년을 맞이하는 동산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여 분위기를 쇄신하고 선생님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줄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80년대에 학교 분위기를 쇄신하고 또 하나의 전환점에서 학교 발전이 추구되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로 고등학교의 경우 2학급이 증설되어 학생 수의 증가로 학교 규모가 늘어났다는 점.
둘째로 중·고 교장의 이취임과 중·고 교사 교류, 신규임용교사 증가 등으로 교원들의 의식에 변화가 있었던 점.
셋째로 재단이사진의 변화에 의한 적극적인 지원 등을 들 수 있다.
(1) 1988년 현황
(2) 중·고 교사(敎師) 교류, 그 명암(明暗)
요즘과 달리 1980년대에 국가에서 중학교는 인건비 보조를 받았지만, 고등학교는 그러질 못해서 고호봉자들이 많으면 학교 운영이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85년 3월 1일자로 중학교 이종만 교장선생님이 고등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고호봉 교사들 중 일부를 중학교에 보내고 동 교과의 젊은 교사를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도록 한 것이다.
표면적인 명분으로 고등학교의 재정 여건 개선도 있었지만, 고등학교의 발전을 위한 고육책으로 인식되었고, 중학교로 전보된 선생님들 중 일부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1988년은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해로 영원히 기억된다. 당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한 169개의 회원국 중, 북한과 북한의 동맹국 10개들을 제외하고 159개국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는데, 아테네올림픽의 뒤를 이어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개막식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이룩한 경제성장을 세계인들에게 보이며 우리의 국력을 전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바로 이 해에 본교는 개교 50주년을 맞이하여 동산인들은 더욱 뜻 깊은 한 해가 되었다. 개교기념 행사로 연례적인 기념식 외에 <동산 50년사>를 발간하는 큰 사업을 했고 학교축제를 예년과 다르게 성대하게 했으며, 기념엽서를 발간하기도 하였고, 교직원들에게 소속감과 자긍심을 갖게 하고자 재단 배지(badge)를 만들어 나눠주었다.
(1) 동산 50년사
(2) 기념엽서 발행과 배부
1988년 당시 교정을 중심으로 4계의 아름다움이 흠뻑 배어 있는 기념엽서를 제작하여 전교생에게 나눠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