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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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규정

직업 초대 야구후원회장

졸업회수 6회

졸업연도 1957년

남기는 글

제10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 - 1955.06.05

제11회 청룡기 대회 우승 - 1956.06.06

 

 

하늘이 만들어 준 청룡기 3연패

 

초대 야구후원회장 이규정(6회)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전국고등학교 야구대회이며,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0회 전국야구선수권 대회의 마지막 결승전은 공교롭게도 같은 인천의 인고(仁高)와 東山이 대결하게 되었다.

  바로 전날 동산 야구선수들은 미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던 끝에, 우리가 이 시합을 양보하면 청룡기를 인천시민에게 영원히 안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날 저녁 박현덕(朴賢德) 감독님께 미팅 내용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선수들의 제안을 들으신 감독님께서는 조용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의 아름다운 뜻은 높이 평가한다. 나는 동산에서 몸을 담고 있으면서 오늘과 같은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고, 숙적인 경남고(慶南高)를 물리쳐 선배님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값진 승리를 얻은 동시에 과거 쓰라렸던 기억을 말끔히 털어버린 상황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다르다. 우리 팀은 지금 상승세를 탔기 때문에 모두가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내일 경기에 임한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본다. 여러분들이 애향심에서 경기를 양보하겠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칭찬하고 싶지만, 내일 결승에서 우리가 승리한다면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바로 너희들이 청룡기 3연패를 이룩하여 야구사에 빛나는 주인공으로 길이 남을 수 있을 것이다.”

  3년 후 감독님의 말씀은 현실로 이루어져, 우리들은 품안에 청룡기를 안을 수 있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 동산 야구는 한국 야구사에 불멸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1955년 당시 인천고 야구부는 다른 팀보다도 월등한 실력을 지녔고, 그 해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팀이었다. 무난하게 결승에 올랐던 까닭인지, 지나친 우월감과 이미 ‘우리는 이겼다.’라는 선입견이 합쳐져 전력투구의 정신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았나 싶다. 반면 우리 동산의 선수들은 그동안의 훈련에서 흘렸던 땀과 눈물을 기억하며 모든 힘을 결승전에서 유감없이 분출하였고, 모교의 명예를 위해 더 한층 분발하여 청룡기를 첫 번째 거머쥐게 된 것이다. 당시 박현덕 감독님과 인천고 김선웅(金善雄) 감독님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동향(同鄕)팀이 맞붙은 시합이었지만, 스포츠의 세계는 이렇게도 냉정하고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1956년 결승전 상대인 중앙고(中央高)는 그 해 가장 승부하기 어려웠던 서울의 강팀이었다. 양교의 투수는 제구력이 매우 좋았고, 볼 하나가 승부의 갈림길이 되는 시합이었다. 모든 사람의 신경이 곤두선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왔는데, 주심의 오른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야구는 심판 판정이 시합의 승패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경기이기도 하다.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가운데로 던졌지만 역시 심판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관중석에서는 모두 야유를 보내는 상황이었고, 우리 편 투수 역시 불만이 가득한 채로 글러브를 내던졌다. 심판은 우리 투수를 불러 경고를 주었고, 마침내 참고 있던 감독님께서 항의를 하는 상황이 20여 분 이상 지속되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겨우 수습하고, 시합은 속개되었다.

  다시 투수가 던진 공은 한복판으로 몰렸고, ‘딱’하는 소리와 함께 공은 3루 선상으로 관중들의 함성과 기대 속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위기는 영웅을 만든다고 3루수였으며 1번 타자였던 이규정(李揆貞)(이 글을 쓰는 나) 선수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공을 건져내며, 승리의 여신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청룡기를 두 번째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이규정 선수에게 그 대회 미기상(美技賞)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승리의 쐐기를 박는 멋진 플레이였던 것이다.

  야구는 하나의 도(道)가 있어야 하며,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정신이기도 하다.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으로 서로 정정당당하게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스포츠처럼 야구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던 대회이기도 하다.

  1957년은 공교롭게도 결승전의 상대팀이 인천고였다. 2년 전에 일어났던 상황이 똑같이 연출된 시합이기도 했다. 2년 전 3연패에 도전했던 인천고는 우리의 3연패를 저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우리 야구부의 승리였다. 세 번째 청룡기를 거머쥐면서, 우리들은 청룡기 3연패의 신화를 그 해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창조하였다.

  고(故) 박현식 선배님과 함께 운동장에서 배팅과 러닝으로 땀을 흘린 순간부터 승기(勝機)를 잡았고 청룡기 3연패라는 신화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뛰었던 선수 – 현재 생존해 계신 황우겸(黃佑鎌), 하명호(河明鎬), 김만근(金萬根)(이상 고 3회), 임준호(林俊浩)(고 5회), 박의양(朴義陽), 이윤영(李潤永), 고덕영(高德永), 이규정(李揆貞), 김완위(金完衛), 이길용(李吉溶)(이상 고 6회), 신인식(申仁植), 정인성(鄭仁聖), 염종운(廉鍾云), 박기련(朴基鍊)(이상 고 7회)과 3연패를 같이 한 박현덕 감독님은 東山이 청룡기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태어났으며, 하늘이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를 실행하는 멋진 연기를 마친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한결같이 연습, 연습, 연습을 통해 야구 유니폼을 입고 정말로 열심히 치고, 받고, 뛰었으며 진정한 땀을 흘렸다.

  어떠한 분야든 진정한 실력자가 되고 싶다면 목표를 세우고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연습만이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대는 사람들의 애환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학생야구였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청룡기 전국야구 시합을 중계방송이라도 하는 날엔 라디오상회에서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 그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웃고 즐기면서 응원하는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런 시절에 1955·56·57년 청룡기 3연패는 하늘에서 만들어준 시나리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아보면 가슴이 뛴다. 동산 야구여, 영원하라!

 

 

졸업생 이미지

성명 박경태

직업 기아 타이거즈

졸업회수 55회

졸업연도 2006년

주요경력

[경력사항]  2006.01~2014.10 기아 타이거즈

            2017 ~ 2019.09  KIA 타이거즈
남기는 글

[매일경제] 선동열 감독 “박경태 인생 최고 투구였다” 2013.09.12

[경인일보] [프로야구를 이끄는 수도권 스타·5]KIA 타이거즈 투수 박경태 - 2012.11.15

 

제26회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공동우승 - 2004.07.14

제60회 청룡기 우승 - 2005.06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감투상 - 2005

 

성명 한명진 (동산중-6년제)

직업 삼진해운 대표

졸업회수 1회

졸업연도 1946년

주요경력

해운업,

제2대 총동창회장 : 1971-1972 재임

2006년 작고

남기는 글

  1968년 제14차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한명진 회장은 6중 1회로, 재학 중에는 야구부 창단 멤버(2루수)로 활약했고, 해운업에 종사하며 열성적으로 동창회 활동을 하였다. 다만, 일신상의 이유로 1971년 사임하고 부회장 장길순(張吉淳) 동문(3회)이 2년간 회장직무대행을 맡아 회장직을 수행했다. 한명진 회장은 삼진해운대표이사, 선광개발 리비아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사업가로도 활동했고,

야구인으로서 작고하기 전 백구회(야구인들 모임) 고문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제2대 회장에 당선된 한명진 동문은 교지 『동산』제15집(1970년 12월20일) 격려사에서 ‘동산 가족의 긍지를 갖자’고 역설했다.

 

 

  이제 동산은 삼십년의 전통을 심고 청년기의 발랄한 기상과 장년기의 원숙미를 가미한 굳건한 자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지나간 연령이 유수와 같이 흘러간 것 같지만 그동안 동산이 겪은 형극의 길은 결코 쉽게 말해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산의 설립부터가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1938년「인천상업전수학교」라는 명칭으로 출발한 동산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힘든 산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 당시 인천에 중등교육기관이라고는 仁中과 仁商(현 인천고) 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도 일본인의 교육기관으로 한국인의 입학이 제한되었으니, 일제는 철저한 교육의 차별로 우리민족의 혼을 빼앗으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교육의 힘만이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고 교육의 힘만이 번영된 사회,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은 인천의 우국지사들은 이런 현상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각자 가산을 기울이고 기부금을 거두어 설립한 것이 우리의 동산입니다. 동산은 철저한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한국인 교육기관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조그마한 목조건물에서 조국의 앞날을 짊어질 역군을 기르기에 고군분투(孤軍奮鬪)했던 동산의 얼은 그때부터 계속 「신의 있는 인간」을 교육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산 가족들은 미덥고〔信〕, 의로운〔義〕행동으로 사회를 살아 나왔고 현재도 조국의 내일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앞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학창시절을 회고해 보면 우리는 극성스럽게도 공부했고 운동했습니다. 대학진학률은 타교보다 월등히 뛰어났고 「야구의 명문」이란 명성은 전국을 흔들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이어져 근년에도 장창선(張昌宣, 중 9회) 선수의 세계 레슬링 제패의 감격을 맛보았고, 태권도 4연패라는 전국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타 육상, 탁구 미술, 밴드, 웅변 등 각부의 활동이 얼마나 눈부셨던가는 교장실에 진열된 수많은 우승기, 우승컵이 입증합니다. 지육(智育), 덕육(德育), 체육(體育)의 내용이라면 동산 교육은 명예의 전당으로 당연지목(當然指目)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

  후배 여러분!

  그동안 우리 동창회에서는 별로 괄목할 만한 일을 못했습니다. 금년 내가 동창회회장직을 새로 맡으면서 느끼는 것은 선배와 후배의 유대를 더욱 견고히 해서 우리 선배가 가지고 있는 동산 가족의 긍지를 여러 후배들의 가슴속에서 뿌리박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도부터 동창회 장학금을 후배들에게 지급할 계획으로 있으며 또한 여러 면에서 선후배의 유대를 굳건하게 하고 우리를 길러준 모교의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후배 여러분!

  동산 가족은 믿음직스럽습니다. 동산 가족은 올바른 행동에 앞장섭니다. 동산 가족은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산 가족은 중등교육, 체육계의 왕자입니다. 이러한 동산의 전통을 명심하고 여러분이 동산가족의 긍지를 갖고 열심히 노력할 때, 우리 모교 동산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의 횃불이 될 것입니다.

  후배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본교 야구부를 빛내고 학교의 위상을 드높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초창기 야구부원 - 19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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