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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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유철종

직업 청룡야구 29ers 창립멤버

졸업회수 29회

졸업연도 1980년

남기는 글

 

 

동산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다



청룡야구 29ers 창립멤버 유철종(29회)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하다. 나도 벌써 동산을 졸업한 지 어언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동산도 벌써 80살이 되었다. 숨차게 살아온 나의 삶 옆에 든든한 동산이 있다는 것이 고맙다. 80년 세월 동안 사만여 동문을 길러낸 동산의 정겨운 선생님들이 고맙다. 가슴 가득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지난 일 몇 가지를 돌아본다.


  나는 지금도 동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한 중학교를 다녔다. 그 중학교에서 나는 줄곧 학급 반장을 했다. 아마도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장 노릇을 한 듯하다. 중 2학년 사춘기 때의 담임선생님은 내게 큰 영향을 주시었다. 민경화 선생님. 그분은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었고, 나는 그분을 아버지처럼 따랐다.(사회에 나와서는 가끔 술자리에 모시기도 했다.)

  규율이 강한 중학교를 마치고 동산고등학교에 입학하니, 동산은 지상낙원처럼 느껴졌다. 그 넒은 운동장과 푸근한 선생님들, 친구를 배려하는 학우들과 따뜻한 학교 분위기. 게다가 민족의 정기를 이어받은 사학의 명문이라는 자부심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그렇게 1학년 생활을 보내는 중에 나는 정말로 큰 선물을 받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민경화 선생님, 그 선생님이 동산으로 부임해 오신 것이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나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반장 할 사람 손들어.” 했을 때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줄 알았다.(담임선생님은 화학 선생님이셨고, 그 선생님 덕에 나는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나는 다시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반장 생활을 계속 했다. 그 덕에 우리 반, 다른 반 친구들하고 다툼도 많이 있었다. 조용히 하라고, 돈 놀이(일명 짤짤이)하지 말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당시 우리 집은 가정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 등록금 마련할 일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내 고민을 아신 선생님이 나에게 학비 걱정 없이 진학할 수 있는 사관학교를 추천해 주셨다. 이 길이 내 길인가 보다 하고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우리 반에서 육사 1명, 공사 2명, 해사 1명이 합격을 했는데, 나는 어이없이 낙방하고 말았다. 반장이었던 내가 낙방이라니 부끄러움 때문에 한동안 멘붕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큰 위로의 힘을 주신 분은 역시 선생님이었다. 나는 조금이나마 부모님께 학비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는 곳이 어딘가를 찾았고, 그렇게 선택한 서울시립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어렵사리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내 일생의 직업을 결정했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하고 장가가고 각자의 위치에서 다들 열심히 살다 보니까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런데 동창회에서 우리의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29회가 인천시초·중야구대회의 주최 기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졸업30주년 기념 스승의 날 행사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산 졸업생이라면 어느 기수나 이러한 큰 행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각자 흩어져서 생활하는 29회 동창생들을 끌어 모을 방법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 끝에, 그래도 동산 하면 야구인데 하고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구나 야구야! 하는 생각에 20여 명 친구들을 끌어 모아서 야구팀을 창단했다. 1998년 일이었다. ‘29ers’라는 야구팀은 이름도 멋졌다. 우리는 유니폼도 맞추고 장비도 구입하고 해서 당당히 동산동문야구팀을 창단했다. 그런 소문을 듣고 30, 31, 27, 25, 24, 21회 선후배님들이 속속 야구팀을 창단했다. 그리고 총동창회 체육대회 때에는 ‘제1회 청룡기동문야구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회 결승전에서 21회 선배님들하고 맞붙어 우리 29회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은 지금도 가슴 뿌듯한 대사건이다.
  그땐 참 열심히 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창들과 함께 야구 연습을 하고 선후배들과 야구 시합을 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야구에 미쳐서 일요일이면 식구들 모두 아들딸 손잡고 학교로 모이는 재미가 너무나 좋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선후배 모두 야구 유니폼 입고 서한샘 선배님 국회의원 시절에 선거 유세장에서 노래 부르면서 선거 운동했던 일이다. 단합된 모습으로 똘똘 뭉쳐서 으쌰으쌰 선거운동 했던 일이 필름처럼 떠오른다.(나는 그때 연수동으로 주소를 옮겨 투표를 하기도 했다. ㅎㅎㅎ)
  이렇듯이 모두가 하나 되게 만들어 준 게 동문들로 조직된 ‘청룡야구’가 아닌가 한다. 청룡야구가 탄생하는 데에 프런티어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이 내게는 매우 크다. 이 야구 덕분에 우리 ‘29ers' 야구를 같이 했던 친구들 외에도 웬만한 29회 친구들은 모두 집사람(부인), 아들딸들을 거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의 아이들이 이제는 장성해서 시집, 장가간다고 청첩장들이 난리다 그래서 그 아들딸들 덕분에 자주 결혼식장에서 만나는 29회다.

  그렇게 열심히 야구에 빠져서 운동할 때 당시의 동산 야구감독인 김학용 선배님이 우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1학년, 2학년생 중에 아주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가 있는데(포수: 정상호, 투수: 송은범),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좀 도와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어찌 돕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두 선수의 어머니를 학교에서 직접 만나 매달 장학금을 전달하는 기쁨을 가졌다. 두 선수가 훌륭한 프로야구 선수로 뛰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그때의 그 덕분에 29회가 야구대회를 주최할 때 송은범 선수가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학교에 와서 우리가 준비한 모자에 100개 정도 사인을 해 주었다. 우리는 방분하신 손님들께 그 사인 모자를 선물하며 으쓱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나의 옛 스승님 몇 분에게 매년 추석, 설 명절 때 조그만 선물을 보내드린다. 아주 작은 선물이지만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했던 분, 내가 좋아했던 분들을 지금도 마음속에 두고 그분들과 관계를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생님들하고 일년에 2번 정도는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 조그만 마음의 선물을 드리면 선생님께서는 꼭 전화를 주신다. 이번에도 잊지 않고 이렇게 선물을 보내주니 고맙네…. 난, 선생님이 행복해하시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선생님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네! 선생님, 건강하시지요? 짤막한 인사를 나누면서 내 마음은 감사와 기쁨으로 넘친다.

  나는 해마다 개교기념일이면 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한다. 어느 학생이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동산 후배면 돕고 싶다. 그것이 내가 다닌 동산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사업이 잘되면 더 많은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희망을 품어 본다.

  이제 동산이 80살이다. 20년 후면 100년의 역사가 될 것이다. 아니 200년, 500년, 1000년의 역사를 쌓을 것이다. 나는 운명처럼 동산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동산학교 졸업생이 된 이상 동산의 희로애락이 나의 희로애락이 될 것이다. 동산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 될 것이다. 나는 동산의 후배들이 이 사회의 훌륭한 인물로 자라기를 열망한다. 그러한 동산이 되는 데에 나도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다.
동산이여, 영원하라. 동산인이여, 바위를 뚫는 우렁찬 파도가 되라.

 

 

 

성명 윤양로

직업 색소폰학원 경영

거주지

이메일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nicehobak

졸업회수 22회

졸업연도 1973년

주요경력

1973년 공군사관학교 입학

1977년 공사25기 임관

남기는 글

[중앙일보]  은퇴 후 새로운 취미활동으로 떠오르는 색소폰 연주!! [인천아이러브색소폰클럽] - 2011.10.10

 

 

동산과의 각별한 인연

음악동문회 총무 윤양로(22회)

 

  ‘동산 80년사’라니, 어느 틈에 모교를 졸업한 지 45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영어속담에 “시간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Time flies like an arrow.)"라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더욱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친[고(故) 윤의섭 님]께서 동산중학교 영어교사로 평생을 봉직하셨던 덕택에, 저희 집안 3형제 모두가 동산고등학교를 졸업(22, 24, 26회)하였으니, 이보다 더 각별한 인연은 없을 것입니다.

  장남이었던 저는 동산중고 22회로, 1973년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에 입학해서 1977년 공사 25기로 임관하여, 27년간의 장교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학창시절 모교 밴드부 활동을 했던 인연을 되살려서 현재는 인천에서 색소폰학원을 경영하면서 후학양성과 무대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인 윤강로는 동산 24회로,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와 동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한체육회에서 사무차장,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스포츠 외교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셋째인 윤득로는 동산 26회로,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저희 선친(先親)과 3형제의 동산 인연을 회고해보건대, 아주 오래 전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읽었던 대목 중, 매월당 김시습이 세조(世祖)에게 설파(說破)한 ‘천만억겁(千萬億劫)을 윤회(輪回)’하고도 남을 그런 인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1968년 중학교 2학년 때 모교강당에서 개교 3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당시 음악선생님이셨던 고(故) 김찬도 선생님 지휘 하에 “다뉴브 강(江)의 잔물결”이란 곡을 연주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나는데 어느 틈에 50년이 잔물결처럼 흘렀습니다.

  이제 65세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일화(逸話)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 이탈리아가 낳은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많은 걸작(傑作)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그릴 때의 일화(逸話)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다빈치’는 예수의 모델을 찾는 데 매우 애를 태웠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피에트로 반디넬리’라는 성가대원을 발견했는데, 너그럽고 고상한 용모가 그가 평소 생각하던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이미지에 맞는 모델이라 여겼죠. 그를 모델로 ‘예수’를 그린 후, 다른 제자들의 얼굴은 그럭저럭 모두 그리게 되었으나, 마지막 한 사람 ‘가롯 유다’만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몹시 흉악하고 타락한 인간이라 생각되는 모델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에 맞는 모델을 찾지 못한 가운데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다빈치’는 로마의 뒷골목을 걷다가 보기에도 혐오감을 주는 얼굴을 한 거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바로 그토록 찾던 ‘유다’ 모델의 적임자라고 생각한 ‘다빈치’는 그를 데려다 앉혀놓고 마침내 ‘최후의 만찬’이란 불후의 명작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다음, 모델료를 지급하고 나서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그는 바로 ‘예수’의 모델이었던 ‘피에트로 반디넬리’였죠.

  한때는 ‘예수’의 모델이 될 정도로 너그럽고 훌륭한 외모를 지녔던 청년이 십여 년의 세월 동안에 ‘유다’의 이미지로 변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요….

  그동안의 타락한 생활이 그 청년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으로 그의 흉한 모습은 더러운 머리칼이나, 남루한 옷차림 때문만이 아니라, ‘자포자기’, ‘원한’, ‘좌절감’, ‘자기혐오’ 등의 무절제한 독소가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겉과 속은 별개의 것으로 보고,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겉만 잘 가꾸어 놓으면 멋있게 보일 것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인 힘은 외모를 변화하고 좌지우지(左之右之)할 만큼 강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내 얼굴은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마음에 맞는 선후배들과 어울려 음악을 하고, 총동창회의 행사에 나가 음악 재능 기부를 하면서, 즐거움의 음악 속에 즐거움의 인생을 수놓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여든 살이 된 모교 동산도 동산의 얼굴을 스스로 책임지면서 100살, 200살이 되도록 푸르게 청춘을 누리는 동산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졸업생 이미지

성명 이영희

직업 제9대 경기도의회 의원

졸업회수 26회

졸업연도 1977년

주요경력
학력 ~ 2010 경원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 2005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 1982 단국대학교 토목공학 학사
~ 1977 동산고등학교
경력 ~ 2018.5 제9대 경기도의회 의원
- 제6대 성남시의회 의원
- 제5대 성남시의회 의원
- 제4대 성남시의회 의원
- 성남시의회 새누리당 대표의원
- 성남시의회 후반기 경제환경위원회 위원장
- 대한민국 ROTC 20기 총동기회 회장
- 성남시인라인롤러연맹 회장
수상내역 2016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2005 한국지방자치학회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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