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성명 임배영 (동산중 6년제)
직업 태종건설 회장
졸업회수 3회
졸업연도 1951년
•경희대학교 졸업, 재인동창회장
•동산중․고등학교 3대 총동창회장 :1972. 10-1984. 12 재임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 레슬링 웰터급 동메달
•경기도체육회 상근부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인천시 제1회 문화상, 경기도 문화상
•대통령 체육포장 수상
•사단법인 한국체육인 동우회 인천지부장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체육·문화부문(2000)
•2006년 작고
[연합포터] 배우 이시영, 임배영 원로에 성화 전달 - 2014.08.13
[인천N조이] 더 찬란히 빛날, 60년의 영광 - 2014.02.06
[인천일보] 인간승리 보여준 "영원한 레슬링인" - 2002.11.07
[KCI등재] 인천의 레슬러 ‘임배영(林培榮)’의 삶 - 2019.02
[경인일보] 체전준비 시리즈- 원로체육인 임배영 -1999.09.16
제19차 정기 총회는 1972년 본교 과학관 4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먼저 박인춘 임시의장이 사회로 개회선언이 있었다. 이정태(李鼎泰) 간사장의 경과보고와 회장 유고로 인한 임시의장 선출이 있었으며 곧 이어 회장 선거에서 임배영(6중 3회) 동문이 회장으로 추대(推戴)되었다.
임배영 회장은 재학 중 레슬링선수로 활약하며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수상했고, 졸업 후 경희대학교에서 체육을 전공하고 모교에서 1954년부터 1963년까지 교편을 잡으며 후배교육과 레슬링선수육성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마닐라)에서 동메달(1954)을 수상하고, 체육 발전에 공헌하여 제1회 인천시 문화상과,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모교의 명예를 드높였다. 대한체육회 이사를 거쳐 13대 국회의원에도 입후보하였고, 태종건설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에도 인천시 체육인동우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체육계 원로로서의 역할은 물론 모교와 동창회의 발전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12년간 동창회장에 재임하면서 동창회와 모교의 발전을 위해 1982년 7월에 <동창회 회칙>을 정비하고, <장학금 지급 규정>을 제정하면서 장학기금조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업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동창들의 숙원이었던 2차 <동창회 명부>를 1982년 개교기념일을 기하여 출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교지 제18호(1974년)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동산학원의 연령도 점점 성숙하여 금년이 벌써 35주년이 되었습니다. 동창생의 한 사람으로 그 감회가 자못 큽니다. 돌이켜 보면 35년 전 일제의 악랄한 수탈이 점차 가열되어 가던 그 시절! 우국지사들이 한숨과 통한으로 밤을 지새우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그 때에 민족 문화의 등불로써의 전당을 이곳 인천에 마련하였으니 이름하여 동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멸시와 천시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시설을 가지고 일제의 독살스러운 눈총을 받는 서러움이 따랐지만 오늘의 동산은 이 나라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하고 힘찬 전진을 하고 있습니다. 야구 동산의 관록, 태권도의 활약, 우취부의 지방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정도 등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후배 여러분, 긍지를 가집시다. 나는 우리 동산 학원의 전통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가 항일의 민족정신입니다. 설립 당시에는 인천에 몇 개의 학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 학교였지 우리 학교와 같이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체육 동산의 기치(旗幟)입니다. 체육은 정신적, 육체적 통일이 없이는 그 성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단결된 마음의 일치에서만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저간(這間)에 전국을 제패했던 야구나 레슬링(특히 張昌宣 선수는 세계 제패), 태권도 등은 모두 동산건아의 단결된 마음의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셋째는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한 민족 학원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는 민족자결주의원칙을 내세우며 민족존중의 봉화를 높이 올렸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적 소용돌이는 3․1운동이란 거족적인 운동을 일으켰으며 이 우렁찬 민족적 절규에서 우리 학교가 고고하게 태어난 것은 바로 민족․민주 정신의 소산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 학원의 전통을 이어 보다 밝은 내일을 향하여 다 같이 합심하여 전진하는 동산학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다름 아닌 면학의 기풍입니다. 간혹 동문 중에서는 모교의 현재 위치를 걱정하는 말을 들려주기도 합니다만, 이는 순전히 내 학교, 내 후배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말들로 애교(愛校), 충정(衷情)에서 나온 것이므로 오히려 따뜻한 정을 느끼는 말들이 아닐까요. 한서(漢書)에「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란 말과 같이 우리의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음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높으신 스승님의 뜻을 받든다면 어려움도 쉽게 풀릴 것이니 일초 일분을 아껴 동산건아의 긍지를 살리기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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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의 곰, 임배영
그 시합은 아주 불쾌한 일전이었다. 1954년 필리핀 아시안게임……. 주룩주룩 소나기처럼 땀이 온 몸에 흘러내리고 마닐라 현장은 기싸움에 잔뜩 독이 올라있었다. 아주 단아하고 하얀 선비 같기도 하고 귀공자 모습의 일본 레슬링 선수 가네꼬가 임배영의 눈에 거슬린다. 임배영은 선수촌 곳곳에서 가네꼬와 마주칠 때마다 기싸움에서 벌써 많은 수를 잃었다. 깊이를 잴 수도 없고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일본인이었다. 차라리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처럼 울퉁불퉁, 우락부락한 중동인이라면 적진이 분명해서 격파해 볼 만 한데 한껏 우리와 닮은 듯 하얀 일본인은 어찌 공수를 나눌지 속수무책이었다. 시합 전날까지 가네꼬의 숨은 무기를 임배영은 찾지 못했다. 다만 끈적끈적하고 보일 듯 말듯, 야릇하고 기분 나쁜 미소, 레슬링이라는 격투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하얀 얼굴뿐인데 가급적 선수촌내에서 눈을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손해를 덜 보는 일이었다. 많은 적진을 깨고 준결승에 올라 왔는데 아뿔싸, 맞은편엔 경계해오던 가네꼬가 벌써 와 있지 않은가? 흔들림 없는 똑같은 모습, 공격을 늦추는 일은 패하는 일일지 몰라 휘슬이 울리자마자 임배영은 혼신을 다해 맹렬하게 가네꼬에게 파고들었다. 기술을 걸었는데 웬걸, 가네꼬는 바위처럼 꿈쩍도 않는다. 다음 순간, 아니 순간보다 더 작은 찰나에 몸은 가벼워지고 허공을 도는 듯한 아찔한 불쾌감이 엄습한다. 그것으로 그만 임배영의 어깨는 매트에 닿고 게임은 종료된다. 그 후로 방심했던 이 악몽은 콧등에 땀을 송골송골 맺게 하며 임배영 평생을 쫓아다니게 된다. 메달은 원하던 색깔이 아니었고 4년을 기다려서 오늘에 왔는데 다시 4년을 기다리기엔 이미 늦은 나이다. 나중에 들으니 가네꼬는 벌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란다. 동메달을 목에 건 임배영은 경무대의 초청을 받는다. 이기붕, 이상백, 프란체스카 여사가 배석한 가운데 백발의 이승만 대통령이 무용담을 들려준다. “손 말고 우리 민족은 발을 쓰는 운동을 해야 돼. 내가 젊은 날, 일본 경찰에게 쫓기던 때가 있었지. 괴나리봇짐을 벗고 무덤가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일본 경찰 3명이 달려들고 있었어. 태껸으로 일본 경찰들 다리를 후려서 위기를 벗어난 일이 있어” 이는 임배영이 일본인에게 패했음을 벌써 듣고 예전에 내가 벌써 일본인을 혼내주었으니 다음엔 패하지 말라는 은근히 힘을 북돋는 위로의 덕담이셨다. 동기들보다 2년 늦게 스타트한 임배영은 동년배이면서 선배인 그들 성화에 옴짝달싹 못하다가 교정 후미에 놓인 60Kg짜리 수레바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 아령을 하니 놀라움과 함께 주위를 잠재우고 괴력을 만천하에 신고한다. 이 일로 일약 동산의 곰이라는 별명을 얻고 각 학교 어깨들이 즐비하게 진을 친 용동 마루턱(싸리재)의 길목을 삼킨다. 동산에서 레슬링부를 만들어 장창선을 조련시킬 때 소문은 흘러흘러 서울 인창고에서 스카웃의 손길이 뻗친다. 동산은 이렇다 할 장학제도가 없었고 장창선은 가난에 짓눌려 있을 무렵이었다. 스승 임배영의 판단에 장창선은 미래를 던진다. “내 품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다. 더 큰 곳으로 가서 더 큰 꿈을 마음껏 펼쳐라.” 날아가게 해 주는 것이 지금 필요한 일이다. 적시적소의 작은 것 하나가 스스로를 훌륭하게 세울 수 있음을 임배영은 잘 안다. 장창선과 주야로 숙식을 함께하던 집과 교정,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빈자리는 보인다. 임배영이 바로 곁에 없으면 어느 게임도 풀어갈 순 없다던 장창선. 이 후 1964년 장창선은 동경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다. 어릴 때부터 짱돌이라고 불렸고 청년에까지 그 별명이 이어졌으며 단단하고 짱짱하고 옹골찬 장창선은 짱돌을 기어코 은메달로 바꾼다. 옥은 옥과 부딪쳐야 그 소리가 천하제일이 된다. 전국대회 국궁 활터를 고르던 박정희 대통령과 발걸음을 맞추던 임배영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약소국 대통령의 이름은 이 세상 아무도 몰라, 그렇지만 브라질 축구선수 펠레라는 이름은 세상의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다 알고 있잖아. 스포츠 선수를 잘 기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돼” 이 무렵, 동산이 기른 임배영은 광복 후 건국 초기 스포츠 연표에 큰 머릿돌이 되었다. 온통 모교 동산의 주문이었고 화두였으며 복음이었기에 임배영은 아호를 아예 ‘동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겐 아무나 가져 보지 못한 복과 행운도 많았고, 그 모든 것을 동산의 공으로 돌린다. 사내가 사는 일은 바로 어제까지도 가시밭길이다. 육중한 몸 전체가 개선문이 되었고, 팔순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목덜미는 아직도 곰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영웅에게 바람은 예를 갖추는 법이 없다. 임배영은 이런 좌우명을 남긴다. “세계는 먼 데 있지 않고, 가까운 데 있다” 동산 불멸의 곰, 임배영은 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 수봉산 무덕정에서 활시위를 당긴다.
※ 이 글은 “동산 70년사”에 수록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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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안정훈
직업 야구선수(투수)
졸업회수 65회
졸업연도 2016년
[스포츠동아] [황금사자기] 동산고 안정훈, 7회말 통한의 안타 ‘아깝다 퍼펙트’ - 2015.06.26
제43회 봉황대기 준결승 진출 - 2015.04.27
제69회 황금사자기 준결승 진출 - 2015.06.26
제3회 대한야구협회장기 우승 - 2015.08.30 (우수투수상)
성명 박창준
직업 인천옹진농협 조합장
졸업회수 29회
졸업연도 1980년
가천길대학교 창업경영 전공
[인천일보]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 무투표 당선] 인천옹진농협 박창준 - 2019.03.08
내게 꿈을 심어준 동산 옹진농협 제12대 조합장 박창준(29회)
모교인 동산을 찾아가면 넓은 운동장이 나를 맞이한다. 그리고 동산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는 청룡상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청룡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東山人이여, 네 꿈을 펼쳐라” - 그 글을 대할 때마다 내 가슴은 용솟음친다. 그랬다. 동산은 나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사람으로서 하여야 할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인천 앞바다의 섬 영흥도 출신이다. 나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영흥도 섬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해 1997년, 뭍으로 유학 와서 운명처럼 동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산은 나에겐 낯설고 설레는 미지의 배움터였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앓았다. 영흥도가 그리워서 학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특히 야구부원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그런 인연으로 훗날에 야구부 후배들이 동계훈련을 영흥도로 몇 년간 다녀갔고, 그럴 때마다 우리 집 돼지 몇 마리는 매년 뜨거운 불판에 올라가 야구부 후배들을 환영하는 먹거리가 되곤 했다. 나는 학창시절에 농사일과 배 사업하시는 부모님 걱정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래서 방학 때는 물론이고 영농철 주말이면, 배에 몸을 싣고 영흥도로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곤 했다. 가뭄이 심한 해에는 집 농사가 걱정되어 학기 중간임에도 학교를 결석하고 집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돕곤 했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크게 나무라시며 학교로 돌려보내곤 했지만, 담임선생님은 심하게 야단치기보다는 오히려 부모님을 사랑하고 집안을 걱정하는 나의 효심을 은근히 칭찬해 주시곤 했다. 군 제대 후 나는 자연스럽게 옹진농협에 입사했다. 그리고 30여 년간의 농협 근무 중 20여 년을 섬지역인(지금은 연육) 고향 영흥도에서 근무를 하였다. 대다수 동료직원들이 도시지점 근무를 선호했지만, 나는 당시 조합장에게 계속 섬에서 근무하겠다고 거꾸로 부탁했다. 고향의 농민조합원들에게 봉사하는 것에서 더 큰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직장 생활 속에서도 나는 고교시절에 진학하지 못했던 대학에도 진학하여 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옹진농협에 내 젊음을 바치면서 나는 때가 되면 더 큰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다졌다. 드디어 2014년, 나는 옹진농협 조합장 출마를 위하여 용감하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선택을 위한 험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정든 직장을 뒤로하고 나선 세상은 한겨울의 어느 추위보다도 매서웠다. 그 어려움 속에서 나는 성실했던 직장생활 덕분에, 그리고 많은 조합원들의 지지 때문에, 특히 동산 선후배들의 뜨거운 성원 때문에, 옹진농협 제12대 조합장으로 당선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진심으로 나를 응원하며 내 손을 잡아주던 지지자분들이다. 고향인 영흥의 압도적은 득표는 물론이고 북도면, 자월면, 서해 최북단 연평도에서 덕적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덕적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문갑도에서까지 동산 선배, 후배님들이 보내준 아낌없는 지지에서 나는 동산인으로서의 신의의 자긍심을 마음껏 느꼈다. 옹진농협 조합장 당선은 내 개인에게는 영광이지만, 이제 앞으로는 개인을 떠나 공공을 위해서, 농촌을 사랑하는 조합원을 위해서 봉사하라는 큰 사명을 하늘이 내린 것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더 높은 봉우리로 인도하는 셀퍼처럼 나는 갈 것이다. 동산인의 명예와 농민조합원의 복리증진을 위하여 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우렁찬 파도소리 바위를 뚫네. 신의에 뭉쳐라, 동산학원” - 교가의 한 구절을 가슴에 품고 올바르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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