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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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유재민

직업 서양화가

졸업회수 1회

졸업연도 1942년

주요경력

서라벌 예대 서양화과

일본 도야마 미술학교

 

성명 정수근

직업 야구선수(외야수)

졸업회수 66회

졸업연도 2017년

남기는 글

[일간스포츠] 인천 동산고 기본기로 따낸 우승, 창단 첫 대통령배 품다 - 2016.07.31

제43회 봉황대기 준결승 진출 - 2015.04.27 (타격상3위)
제69회 황금사자기 준결승 진출 - 2015.06.26
제3회 대한야구협회장기 우승 - 2015.08.30

제70회 황금사자기 준결승 진출 - 2016.05.17
제71회 청룡기 준결승 진출 - 2016.07.14
제5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 2016.07.31 (최우수선수상)

 

성명 김우찬

직업

졸업회수 30회

졸업연도 1981년

남기는 글

 

 

 

잊지 못할 추억, 그리고 선생님

 

김우찬(30회)

 

  나는 198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78, 79, 80년 3년 동안 동산의 품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실제 나와 우리 학교와의 인연은 입학하기 3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대헌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동산의 넓은 운동장을 선망하면서 중학교 3년간 동산학교를 오가던 것이다. 1977년 중3 2학기 때, 그 당시 동산의 자랑이던 대강당이 불에 타던 것도 똑똑히 보았으니 나와 동산의 만남은 이미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 전국체전 매스게임

  1978년 전국체전은 인천에서 열렸다. 당시 국가적인 행사에 학생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각종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은 우리 학생들의 몫이었다. 우리들은 제고, 인고, 동인천고 학생들과 함께 하는 합동 매스게임에 참여했다. 학기 초부터 시작된 매스게임 연습은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반납하면서 계속되었다. 처음엔 학교별로 연습을 했고 여름방학을 시작하면서는 네 학교가 함께 모여서 연습을 했다. 여름 땡볕에 먼지 풀풀 나는 운동장에서 수돗물 먹어가며 연습하다가 어쩌다 나오는 서울우유와 보름달 빵에 우린 감격했었다.

  체전을 두 달여 남기고는 당일 입을 실제 유니폼이 지급되었고 각 팀별로 각자 연습하던 것을 공설운동장에서 모두 모여 합동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야구장에 집결하고 자기 차례가 되면 메인스타디움으로 입장하여 연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습시간보다는 대기시간이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오고 가며 만나는 참가자들, 특히 여학생들을 보는 재미로 싫증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가슴이 훤히 패인 수영복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고 나온 인천여고와 인일여고 학생들을 보고 우리는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체전 당일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모두 긴장하였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우리가 매스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줄을 맞추기 전에 시작 음악이 나와서 시작부터 우왕좌왕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같은 대통령 각하 앞에서 그런 실수를 하다니……. 아마 실수한 사람은 그 무섭다는 중앙정보부에 끌려 갈 수도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 매스게임과 관련하여 오랜 시간 뒤에 알게 된 사실 중에 우리 매스게임을 총지휘하셨던 분이 당시 인고 체육선생님이셨던 동산 13회 김충회 선배님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즐겁게 했다.

 

둘, 모내기 봉사활동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우리의 시련은 매스게임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내기철이 되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전국은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국가적 위기에 우리가 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우린 물푸기와 모내기에 동원되었다. 지금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장수동이나 소래 근처의 논으로 농민을 돕기 위해 두 팔 두 발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은 재미도 있었고 나름대로 가슴 뿌듯한 감격의 시간이었다. 새참 시간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주민들이 몰래 주시던 막걸리 한 잔과 은하수 담배는 자기 논에 데리고 가서 일을 빨리 마치고 싶은 농민들의 소박한 욕심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지나가는 트럭에 수십 명이 올라타서 시골 길을 달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셋, 송대헌 선생님의 카리스마

  1978년 1학년 1반 담임 겸 1학년 주임 선생님은 송대헌 선생님이셨다. 1학년 선생님들 중 제일 연장자여서 학생지도에 모범을 보이시려고 그러셨는지 1학년 1반은 월요일 아침마다 타작 소리와 곡소리가 났다. 이유는 월요일 아침마다 지난 주 공부한 영어 책을 외워오지 못한 친구들은 여지없이 선생님이 그 매서운 매로 응징(?)하셨기 때문이다. 아마도 반 평균을 올리는 건 영어 점수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 몸으로 때우다 급기야 아버지를 모시고 온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의 아버지와 그 친구가 했던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아버지 왈, “우리 아들 대학 안 가도 좋고 미국 갈 일도 없으니 영어 못 한다고 때리지는 말아 주세요.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됩니다.” 친구 왈, “저는 국어책도 못 외우는데 영어책을 어떻게 외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친구 영어 공부 안 하고도 졸업 무사히 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매스게임을 연습할 때도 FM자세를 항상 요구하셨고 다른 학교와의 합동연습 때에는 휴식시간에도 줄 맞춰서 쉬라고 하시며 잠시도 우리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이셨다. 나중엔 다른 학교 학생들도 선생님 앞에서는 정숙해지곤 했으니까 과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동산의 맛살’ 송대헌 선생님의 카리스마는 인천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3년 동안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한 대라도 안 맞고 졸업한 동문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넷, 독순이 선생님

  우리와 친구처럼 지내시던 박찬희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셨지만 스스럼없게 우리를 대해 주셨다. 1학년 때는 ‘원더 우먼’이 별명이었던 유동희 선생님이 독어를 가르쳐 주셨고 후임으로 오신 분이 박찬희 선생님이셨다. 다른 여자 선생님과 다르게 와일드하게 우리를 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우린 장난으로 대응했다.

  2학년 1반 독어시간. 칠판지우개를 모두 숨기고 어디서 구했는지 죽은 쥐 한 마리를 교탁 밑에 숨겨 놓은 2학년 1반 악동들. “지우개 어디 있니?” “교탁 밑에요!” 아무 의심 없이 손을 집어넣어 지우개를 찾던 선생님 손에 잡힌 것은 미키마우스의 시체. 그 시간 수업은 당연히 중단되었고 교무실로 달려가신 박찬희 선생님 대신 달려오신 선생님은 1반 담임이셨던 ‘해골’ 이성우 선생님. 그 날 1반 애들 맞느라고 화장실에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의 구타 노동으로 이성우 선생님은 더욱 더 해골스러워지셨다.

  1반의 통쾌 유쾌한(?) 사건이 있었던 며칠 후. 우리 2학년 2반 독어 시간. 수업이 시작되고 조금 늦게 들어오는 야구 선수들. “야! 너희들 수업 들으려면 시간 맞춰 들어와야지. 왜 늦는 거야. 독일어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그 말에 발끈한 야구 선수 某군 “내가 왜 독일어를 못해요? 저도 독일어 할 줄 알아요!” “그래? 해 봐…!” “뮌헨,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 “차붐.” 그 당시엔 분데스리가가 영국 리그보다 유명할 때였고 차범근 선수가 높은 주가를 날릴 때였다.

  공부 안 한다고 구박하시고 열악한 학교 시설을 보고 학교가 이게 뭐냐고 속상해 하셨지만 소풍 때 친구들과 함께 말뚝박기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선생님이 우리를 좋아하시고 우리와 친해지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선생님의 진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뵙고 얘기 나누다 보면 거의 모든 친구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안부를 물어 오신다. 뿐만 아니라 그 얘기 속에는 온전히 동산인으로 생활하시며 동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지금은 변한 세상에 맞게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보고 듣는다. 여전히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박찬희 선생님이 오랫동안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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