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전체보기

졸업생 이미지

성명 노명선

직업 로얄관광 호텔 대표이사

졸업회수 9회

졸업연도 1960년

주요경력

•보성관광 호텔 설립 대표이사

•로얄관광 호텔 설립 대표이사

•(주)동명정판 설립 대표이사

•강화 로얄관광호텔 설립 대표

•동산로타리클럽 회장

•서흥장학회 설립 회장

•20여년간 동산 재학생 60여명에게 약 1억여원 장학금 전달

•동산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장학위원장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사회·경제 부문(2006)

남기는 글

졸업생 이미지

성명 김종상

직업 부산지방국세청장

졸업회수 14회

졸업연도 1965년

주요경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제1회 공인회계사 합격

•제6회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

•USC․Berkery 대학교 연수

•성동, 남대문, 여의도세무서장

•서울지방국세청 재산세국장

•본청 기획관리관, 재산세국장

•부산지방국세청장

•(주)KT이사회 의장

•세일회계법인 대표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정·관계 부문(2005)

남기는 글

* 저서 “국세청사람들”, “셋째이야기” 외 3

 

 

東山은 내게 일류학교였네

 

前 부산지방국세청장 김종상(14회)

 

 

□ 동산고등학교 1등 합격

  필자는 1946년 인천 송림동에서 출생해서, 유년시절은 예전 인천고등학교 뒤편 유동(柳洞)에서 자랐고 인천 창영초등학교, 인천중학교를 졸업하였으니 정통 인천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인천에서 일류 중학교라고 치던 인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적도 한 반에서 10등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많은 친구들과 함께 당연히 제물포고등학교로 진학했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동산고등학교를 졸업(10회)하여 고려대학교 상대에 진학해 있던 필자의 바로 위의 형님(김실)의 주선과 6ㆍ25 이후 홀어머니 슬하에서 오형제가 자랐으니 그 경제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사정 등을 감안하여 장학생으로 동산고등학교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인천의 교육계를 대표하시던 유명한 교육자 길영희(인천중학교ㆍ제물포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남상협(동산중ㆍ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해마다 장학생 추천문제를 협의하셨다고 하는데 필자도 그분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같은 시험지로 똑같은 날 시험을 치러왔는데, 필자는 입시준비 기간을 열심히 활용하여 실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결과 당시 제일 유명한 경기고등학교 입학성적을 여유 있게 초과하는 성적으로 수석합격을 하게 된 것이다. 입학식 날 강당에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국의 모든 수석합격자들에게 제일모직이 증정한 303표 털실을 받은 기억이 나고, 그 털실로 만든 스웨터는 어른이 되어서도 몇십 년을 입고 지내며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간직하였다.

 

□ 일류대학 출신의 선생님들

  우리 동산고등학교는 야구, 레슬링을 비롯하여 운동으로 유명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공부로는 일류대학입시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동산의 우리 기수(14회)를 대표하는 공부선수라는 자부심과 오기가 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이었던 것은 담임선생님(박중홍)과 강의를 담당하는 선생님 대부분이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임병운 선생님을 비롯하여 특히 많았음) 등을 졸업하신 쟁쟁하신 분들로 짜여 있었는데, 그 당시(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취업의 기회가 적었으므로 그분들은 사립학교의 교직자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분들은 몇 년 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계획이 성과를 보이면서, 대한항공을 비롯한 주요 그룹 그리고 대학교의 교수 등으로 직장을 업그레이드하여 더 큰 활약을 하시게 되었다. 그 선생님들의 수업을 받게 된 것은 다른 일류학교 못지않게 내게는 행운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어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학생들의 수준이 비교적 낮으니 수업의 진도가 기본적(쉬운 편)인 문제를 중심으로 강의가 이루어져도 필자는 “그런 것 다 아는 것인데”하고 한눈을 팔면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을까 하여 늘 열심히 들었더니 기초가 충실해진 측면이 있었다. 또 어떤 선생님(과목)은 학생들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그냥 진도를 진행해서 나를 비롯한 몇몇만이 따라갈 정도였으니 이게 오히려 득이 되는 측면이 있었으니 어떻든 필자에게는 귀중한 선생님들이셨다.

 

□ 동산 출신 서울대 법대 2명 합격

  이렇게 해서 필자는 3년 동안 모든 과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을 계속했다. 신학기 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특대 상장을 받고 수업료를 전액 면제받고 있었으니, 외부에 나가 야구 청룡기ㆍ황금사자기 등의 우승, 레슬링 전국대회 ○○급 우승 등은 아니었어도 공부선수로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는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 다른 일류학교 우등생에 지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만” 하고 정진을 거듭했으니, 아마도 내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3년이 아니었나 싶다.

  진학할 대학을 정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경희대학교에서 매년 실시하는 “전국고등학생 학술경시대회”에 출전하여 개인 과목 “영어부의 1등” 그리고 전 과목(물리ㆍ화학 등 모두 포함) 부분에서 10등이라는 의외의 좋은 성적을 올렸던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을 얻은 필자는 결국 서울대 법대(법학과)를 지원하게 됐는데, 시험을 끝마치고는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어쩌면 신문에 큰 글씨로 “김종상 수석합격” 하는 정도가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체 10등 안에 들었던 필자는 즉시 장학금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모교에서 은근히 기대했던 대로 다른 대학으로 조금 낮춰 선택했으면 수석합격으로 동산의 명예가 더 하늘을 찌를 뻔했을 것이다. 1년을 재수한 김녹규(13회) 선배도 함께 합격했으니 ‘동산 출신 서울법대 2명 합격’이란 것이 인천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오히려 제고(제물포고등학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서울법대에 합격한 황우여(판사 역임, 교육부장관 역임) 군은 중학교 동창으로 다시 대학에서 만났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 동산고교 때 상업부기 공부 덕분으로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

  우리 동산고등학교는 다른 고등학교처럼 일류대학 합격을 목표로 한 집중적인 전략을 세우지 않고, 고2까지는 거의 모든 과목을 공부하도록 하고 있었다. 서울대ㆍ연대ㆍ고대 입시반을 만들어 운영해 봐도 뚜렷한 성과가 있다는 보장도 없으며, 자질이 훌륭한 선생님들을 채용하여 근무시키고 있었는데 대학입시과목 중심으로만 교육한다는 것은 남상협 교장선생님의 학교운영 방침에도 부합되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운영에 대하여 일부 학생, 학부모들의 불평이 적지 않았고, 자신이 필요치 않은 과목의 수업 때는 딴전을 피우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필자는 모든 과목에서 1등을 하여야 하는 모범생이었으므로, 문과 지원생으로 긴요하지 않은 물리ㆍ화학ㆍ상업부기까지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전국학술경시대회에서 전 과목 부분에서도 입상을 하는 전천후 공부꾼이 되었고, 서울법대 선택과목도 물리(대부분 일반사회를 선택하지만 그때까지만 화학과 함께 가능하였음)를 택하여 득점전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차후 내 일생에 중요한 선택이었던 공인회계사 시험에 쉽게 합격하게 된 것이 고2까지 상업부기를 열심히 공부한 탓이었다.

  이제 영광스런 대학의 입학(1965년)과 더불어 필자의 인생은 자부심과 보람으로 붕 떠올라 나름대로 황금시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 스트레스 속에서 짓눌려 있던 자아(自我), 모범생이라는 틀 속에서 뛰쳐나온 필자의 진면목(眞面目)이 활짝 꽃피우기 시작했다고 할까? 새로운 대학 친구들과 사귀며 대학로ㆍ종로거리를 누비며 막걸리파티ㆍ여대생들과 미팅ㆍ데이트 그리고 용돈을 버는 아르바이트 그리고 법불회(法佛會)등 학회(동아리)활동 등으로 바쁘게 지내며 그 기상이 대단하였는데 그렇게 2년을 지내고 3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이렇게 놀기만 해서 되는가 하는 회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그 대상을 엉뚱하게도 공인회계사 시험으로 그 해 봄에 주판을 튀기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공인회계사(제1회) 시험에 무난하게 합격하였다. 필자가 상대(商大)도 아닌 법대 출신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동산고등학교 때 서울상대 출신인 이종형 선생님으로부터 부기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이 그 밑천이었던 것이고, 집안 형(김실)이 바로 작년도 계리사 시험으로 합격하였던 것과 가까운 친구들이 그 시험공부를 하는 바람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된 것이다. 나름대로 또 한 번의 영광이었고 또 한 번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이 너무 “자만심”으로 커 나가서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사법고시 대신 행정고시로

  법대생으로는 조금 엉뚱하게 공인회계사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이 다음에 사법시험(고시)에 계속 실패하면 군대 가면 장교로 갈 수도 없고 또 실업자 될 염려가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결국 대학 4학년 때 본격적인 목표인 사법시험을 겨냥하여 1차 시험은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이제 어려운 논문시험인 2차 시험(그 당시에는 100명 미만의 합격)에서는 보기 좋게 낙방하였던 것이다. 시험이라고는 처음으로 떨어져 본 것인데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시험은 1년에 한 번씩 있게 되므로, 이제 내년 이맘때까지 차분하게 공부하여야 할 것인데, 무언가 너무 길다, 당장 뭐 할게 없나 하고 찾았을 때 행정고시(행정부의 5급 공무원에 채용되는 시험)가 6월 중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당시 강화도의 적석사라는 절에서 친구 하나와 공부하고 있는데 형님(김실)이 시험 준비에 필요한 책들을 갖춰 주셔서 세 달 동안을 정신없이 공부하고 최선을 다한 덕분에 최연소로 합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두 가지 시험에 합격했으니 원래의 목표인 사법고시에 대해서는 욕망이나 추진력이 약해지고, 더구나 주위의 축하와 부러움 속에서 그럭저럭 대학의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 야구 잘하는 동산고등학교 출신…?

  대학 졸업(1969년)과 동시에 공인회계사 합격과 행정고시 합격이라는 두 가지 타이틀을 간직하고 육군경리장교로 입대하게 되었다. 6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지금 경기도 성남시 창곡동(남한산성 기슭)에 있는 육군종합행정학교 경리학처에서 교관으로 3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런대로 보람 있던 군 생활을 마치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1973년)하여 1974년에 인천세무서의 조사과장, 그 후 1976년의 동인천세무서 부가가치세 과장을 하면서 고향에 돌아와 낯익고 정다운 식구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자주 따라다니는 질문은 고향이 어디며,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특히 어느 고등학교 출신인지가 관심거리인 것은 전통적으로 삼연(혈연ㆍ지연ㆍ학연) 사회인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실정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 끝에 “고향이 인천입니다.” 하면 따라 나오는 질문이 “그럼 제물포고등학교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동산고등학교 나왔습니다.” 하고 정정해 주면 상대방은 조금 당황해서 “아! 거, 야구 잘하는 학교 말입니까?” 하는 식이었다. 젊은 나이에 행정고시 출신에 관리직(세무서 과장 등)을 맡고 있으며, 좋은 대학을 나왔다니 지레 어느 고등학교 나왔겠지 하는 것이며, 동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야구니까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곤 한 것이다.

  아무튼 서울에서는 동산 출신은 어딜 가도 만나기 힘들고, 더구나 공직사회에서는 인천 전체를 또는 서울ㆍ경기ㆍ강원도 즉 중부권으로 쳐도 많지가 않아서 우리나라의 지연 등을 따지는 풍토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영남권 특히 TK(대구ㆍ경북) 출신들이 잘 나가고 그 후 호남출신이 한가락 하던 시절에 인천 출신은 언제나 허전하고 빛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저 제 실력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가끔은 너무 외롭고 허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본청의 과장ㆍ세무서장 그리고 국장을 거처 부산지방국세청장까지 거치는 동안 동산과 제고(인천중학교 출신이라고 자기들 식구로 취급)를 포함한 인천 전체 식구들의 어른노릇을 해 왔다. 세금문제에 관련하여 동산과 인천지역의 선후배들과 적지 않게 상담도 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기도 하였던 것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 10년 동안의 재경동창회장

  너무 빠른 고시 회수(동기생들 중 유명인사로 이헌재 전 재경원장관ㆍ강봉균 의원 등이 있음) 그리고 호남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1998년 부산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명예퇴임을 하게 되고 현재까지 세무ㆍ회계 법인을 설립하여 그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동산을 위하여 총동창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송기덕(1회) 선배님ㆍ신윤하(7회) 선배님 그리고 최근까지 가장 오랜 기간 활약을 해주신 서한샘(11회) 선배님들께 여러 가지로 지도와 도움을 받아온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신윤하 선배님이 총동문회 회장으로 동창회 기금 마련 등에 앞장서실 때 서울지역의 동창회 지부를 만들어 보라는 말씀으로 1997년 7월 7일 7시에 재경동문회총회를 개최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동기 김동수 회장과 함께 시작하여 매년 7(월)-7(일)-7(시)에 총회를 개회하면서 2007년까지 10년 동안 서울지역 선후배들이 등산 등 행사를 함께하고 우의를 다져오는데 회장으로 앞장서 왔다. 또 1995년에는 14회 회장을 맡아 졸업 30주년에 모교의 스승님들을 모시고 홈컴잉〔모교방문〕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 등이 필자가 “동산인”으로 해온 작은 업적들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우리 동산이 80주년을 맞이한다. 동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56년 전(1962년)이니 필자도 이제 고참급에 속하는 동산인이다. 동산고등학교는 필자에겐 정말 일류고등학교였고 이곳에서 공부한 3년을 밑천으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고 평생을 잘 지내왔다. 그동안 어려울 때 가끔은 우리 학교가 통상 말하는 일류였으면 하고 투정이나 원망스런 생각도 있었지만, 다시 동산의 뿌리로 돌아오곤 했다. 80주년의 현장에서 건배 구호를 외치고 싶다.

“우리는 동산!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신의에 뭉친다!”

 

 

졸업생 이미지

성명 박진수

직업 (주)비에스이(보성전자) 대표이사

졸업회수 7회

졸업연도 1958년

주요경력

•동국대학교 인문대 졸업

•(주)청석물산 대표이사

•(주)비에스이(보성전자) 대표이사

•중소기업의 날 대통령 표창

•벤처기업 대상 산업자원부장관 표창 수상

•석탑산업훈장 수상(2002)

•2004 무역의 날 7000만불 탑 수상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교육·문화 부문(2005)

남기는 글

검색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