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성명 유형우
직업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회수 64회
졸업연도 2015년
[동산문화] 31호 발췌- 2015.03.02
성명 김석배 (전수1회)
직업 사진작가
졸업회수 1회
졸업연도 1942년
2017년 작고
제1회 졸업생의 추억담
나는 가친(家親)의 막역(莫逆)한 친구로 우리 집 뒤에 사시던 김영배 씨, 삼심기선주식회사 사장 김종섭 씨, 그리고 당시 경성지방재판소 인천지원의 판사이시던 김세완 씨 등 설립자들께서 장차 5년제 상업학교로 발전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믿고, 1939년 당시 ‘인천상업전수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였습니다.
당시에 학교라고는 했어도 어쩌면 ‘서류상’ 존재한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율목동 무덕관의 가교사(假校舍)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A조와 B조 두 반으로 학생 수는 약 120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이 학교였지 운동장도 없는 가교사에다 교복은 모표도 없이 일본군이 쓰는 전투모를 쓰고 국방색(카키색) 군복차림에다 각반을 차고 다녔습니다. 모표는 약 반년 후에 만들어 달고 다녔습니다. 모표도 없는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하니 어린 나이에 참 창피하였습니다. 당시 김영배 교장선생님은 수신(修身)과 중국어를 가르쳐 주셨고, 영어, 국어(일본어), 부기, 수학, 국사(주로 일본역사), 세계역사, 지리, 체조 등을 선생님들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검도는 당시 일본 강도관 검도 5단(명예 7단)으로 연희전문학교 무도사범이시며 경기도 경찰국 무도사범이셨던 강낙원 선생(6.25 때 납북됨)께서 무보수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또 유도는 무덕관 관장이신 유창호 선생님께서 담당하셨고, 민법은 김세완 판사(후일 대법관)께서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일제말기로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고 전시체제라 교련은 필수과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교 출신 재향군인을 교련 교관으로 맞이할 형편이 안 되어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와 교섭하여 김영배 교장이 인천상업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로 하고 인천공립상업학교의 교련교관인 야마구치(山口) 육군중위를 시간 교관으로 초빙하였습니다. 그러다 2학년 무렵 다까이(高井) 준위가 정식으로 교련교관에 부임하게 되였습니다.
1940년 2학년 때, 비로소 송림동에 신축된 교사(현재의 동산중고등학교 위치)로 이사하였으나 운동장이 마련되지 않아 재학생들이 방과 후 매일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운동장 건설에 참여하였습니다. 곡괭이와 삽으로 파낸 흙을 담은 담가(들것)를 두 명의 학생이 들어 날랐고, 나중에는 기차 레일을 깔고 리어카에 실어 날랐습니다. 지금의 운동장 일부를 당시 재학생의 땀과 노력으로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모교를 방문할 때마다 잘 다듬어진 지금의 운동장을 바라보면, 1940년 당시 운동장 공사에 동원되어 힘든 일을 하였던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래서인지 동산학교에 남다른 애착심이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범하여 전쟁을 하다가 무리하게 미국 하와이를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켜 남방공영권을 만든다는 미명 아래 전쟁을 확산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레이더(전파탐지기)를 개발하여 해군에 배치하여 레이더로 조준 사격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막강한 연합함대를 전멸시켰습니다. 또, 미국의 발달된 통신 도청 기술로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도(山本) 해군 원수가 탑승한 항공기가 발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가다르가날 상공에서 격추시키고 미국이 이 사실을 먼저 발표하여 일본 해군의 사기를 극도로 꺾어서 일본은 패전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와중에 학교에서는 이른 새벽에 상인천역으로 학생들을 동원시켜 재향군인 출정을 환송하도록 하였고, 남방전선으로 배치되기 위해 기차로 인천항으로 온 만주 주둔군을 환영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새벽에 학생들이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 일제 전쟁 수행의 도구로 이용되었고, 학교에서도 육체노동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시총동원령에 따라 학제나 교육과정이 편성될 정도이니 짐작할 만하지요. 그렇게 3년을 마치고 1942년 3월 7일 제1회로 졸업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후에는 차이나타운의 중국요리점 공화춘에서 사친회를 하고 해산하였습니다.
오래 살다보니 모교의 개교 70년사에 미력하나마 글을 쓰게 되어 나로서는 남다른 감격을 느낍니다.
* 필자 : 1924년생, 사진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셨으며, 총동창회 홈피 단골이셨다. 총동창회 일에 열심히 참여하셨고 새까만 후배들과 즐겁게 교류하셨다. 2017년에 작고하셨다. 이 글은 ‘동산 70년사’에 수록된 글을 전재한 것이다.
성명 신희범
직업 ㈜우석켐 대표이사
졸업회수 16회
졸업연도 1967년
•명지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경영대학원 AMP 수료
•㈜우석켐 대표이사
•대한적십자사 중앙대의원
•공동선운동연합 이사
•제10대 동산중·고 총동창회장 : 2008. 3. 21. - 2012. 3. 20. 재임
•학교법인 동산육영재단 이사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사회·경제 부문(2012)
2006년부터 수석부회장으로서 헌신적으로 동창회 활동을 해 왔던 신희범 동문(16회)이 2008년 3월 21일 정기총회에서 제10대 총동창회장으로 선출되어 4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며 총동창회를 새롭게 중흥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신희범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역임하였고 사회에 나가 사업에 성공하자 동산에 대한 봉사를 당연시한 전형적인 동산인이었다. 신희범 회장은 총동창회의 숙원사업이었던 동창회 사무실을 매입하여 번듯한 사무실을 영구히 가질 수 있는 동창회로 만들었으며,
개교 70주년을 맞아 청룡상을 건립하고 ‘동산 70년사’를 발간한 혁혁한 공을 이루었다. 지금은 학교재단 동산육영회의 이사로 참여하여 동산에 대한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신희범 회장의 임기 중 주요 활동내용을 알아본다.
1.'청룡상'건립과 취지 개교 70주년을 기념하여 동산인의 표상인 ‘청룡상’ 건립을 추진하여 7월 12일(토) 홈커밍데이(모교 방문의 날)를 겸하여 제막식을 하였다. 2008년 3월 21일 정기총회에서 각 기수 회장단 및 산하단체회장단의 동의를 얻어 추진하였다. 청룡은 東山과 매우 인연이 많으며 東山은 청룡(靑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방(四方)에 신(神)의 존재를 믿었는데 동(東)은 청룡(靑龍), 서(西)는 백호(白虎), 남(南)은 주작(朱雀), 북(北)은 현무(玄武)이며 옛 조상들은 이 가운데 동서(東西)의 신(神)을 중요하게 여겨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란 사상이 성립된 것을 볼 때 동산의 상징은 청룡이다. 청룡기야구대회에서 본교는 6번의 우승을 했으며 자랑스럽게도 3년 연속 우승으로 청룡기를 영구 보존하는 영광을 갖고 있다. 건립기금을 희사하신 동문 및 외부 인사들 554명의 명단은 ‘70년사’에, 일정금액 이상 희사하신 분은 청룡상 좌대 뒤에 이름이 기록되었다. 동산인의 정성으로 건립될 ‘청룡상’은 동산의 전통을 이어줄 고리 역할을 할 것이며 재학생들에게는 도약의 표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2. ‘동산 70년사’ 발간 취임 전 2007년부터 추진되어 오던 편찬 작업을 마무리하여 모금된 ‘청룡상’건립 비용의 일부로, 화보 포함 930쪽 분량의 ‘동산 70년사’를 발간하였다. ‘50년사’에 이어 20년간 동산 역사는 물론, 동창회 장학사업, 동문체육대회, 동산인의 밤, 자랑스런 동산인상 수상 내용, 졸업 30주년 기념 사은회, 초중 야구대회, 동문야구대회 등과 산하단체활동 등 동창회 활동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3. 총동창회관 마련 동산총동창회가 제대로 된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나마 전세를 얻어 십여 년을 버텨온 것도 전임 회장들의 덕분이었다. 그래서 번듯한 총동창회관 건립이 숙원사업이 되었었다. 그것을 해결한 것이 신희범 회장이다. 신 회장은 2008년 10월, 그동안 전임 회장들에 의해 적립되어온 회관 건립 기금 3억 3천만 원에 은행 융자를 얻어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593-8 메카리움 빌딩 4층에 60평 면적의 총동창회 사무실을 매입하는 용단을 내렸다. 이로써 동산총동창회는 항산(恒産)을 마련하여 자가(自家) 사무실을 가진 동창회가 되었으며 사무실 일부를 임대하여 얻는 수입으로 운영비를 충당하게 되었으니 신희범 회장의 공로가 지대하다 할 것이다.
4. 야구후원회 발족 동문들에게 모교애를 갖게 하고 소통과 화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동산야구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모든 동문이 참여하는 후원회를 만들어 1구좌를 일만 원으로 하고 형편에 따라 지원할 구좌수를 결정하여 부담 없이 야구후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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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70년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