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발전(1960~79년)
1960년대는 개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60년의 4․19 학생의거, 1961년의 5․16 군사혁명의 결과로 제 2, 제 3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학생회 조직 등 학원의 자율화 움직임과 제 3공화국에서의 인간개조운동과 함께 중학교 무시험 진학, 국민교육헌장 제정과 공포 등 과감하고도 구체적인 교육의 개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개혁기에도 동산학원은 큰 흔들림이 없이, 인천 최대 규모의 초현대식 강당을 준공하는 등 점진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개교 30주년과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맞이하였다.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장기집권, 그리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가열되면서 급기야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이러한 국민적인 민주화 요구에 부흥하여 본교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본교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천의 중심지인 신흥동 로터리까지 진출하였고, 횃불시위 등도 시도하였다. 또한 학교 당국과 학생들의 갈등도 분출되면서 본교는 오랫동안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 2공화국이 출범하여 문교시책으로 학원의 정상화와 교육자치제의 활성화,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학원 문제와 함께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혼란이 거듭되던 중,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민주당 정권은 무너지고 혁명 정부가 들어서고 이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 정부는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경제 발전과 국방력 강화, 그리고 국가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영향으로 안보교육이 강조되고 위로부터의 명령적인 교육으로 교육의 자주적인 역량은 점점 쇠퇴하고 주체성 함양 등 획일적인 인간개조정책이 부각되었다.
(1) 학생회와 재건학생회
4․19의거를 계기로 이전의 낡은 제도는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로 학도호국단의 해체와 학생회라는 민주적인 학생 기구의 탄생이다.
학도호국단의 창설과 개편은 국가 위기에서 이루어져 이미 창설 목적이 달성되었고, 그 운영 내용 또한 시대적 요구와 맞지 않고 운영방식도 일부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전체 학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고, 명칭도 민주적인 학생 자치기구로서 부적당하다는 여론에 따라 학도호국단은 창단 10여 년 만에 해체되었다.
한편 문교부는 중등학교에서 학교장 책임으로 학생 자치활동이 무리 없이 잘 되도록 하고 특별활동과정을 철저히 이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는 ‘학생회’라는 학생 자치기구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5․16 이후의 제3공화국은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시책들을 단행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 교육면에서도 인간개조운동으로 재건국민운동을 강력히 추진된 바, 학교에서는 ‘재건학생회’가 조직되었다.
(2) 사은회(師恩會)의 조직
4․19이후 당시 본교 교사들 중 상당수가 ‘전국 교원노조’의 중책을 맡는 등, 교사의 처우개선과 교육정책에 대한 의견을 요구하며 교원노조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5․16이후의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1961년 9월 1일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공포하는 등 교육제도 전반에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본교에서는 4․19이후의 교원노조 활동과 병역 문제 등으로 많은 교사가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또한 교사의 정년이 65세에서 61세로 낮추어짐에 따라 뜻밖의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전국적으로 별다른 생활 대책 없이 학교를 떠난 퇴임교사들을 돕기 위한 학생들의 사은회가 조직되었다. 1963년 고등학교 3학년인 정기훈군은 사은회 설치의 취지를 당시 「동산학보」(제 61호) 에 발표하였다.
이 취지문을 통하여 당시 선생님에 대한 본교생들의 갸륵한 정성과 태도는 물론 사제지간의 정을 담뿍 느낄 수 있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은사에게 보답하는 길 -사은회 조직 취지문-
1963년 7월 13일 개교 25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과 여러 행사가 있었다.
기념식에는 도지사, 교육국장 등 많은 귀빈이 참석하였다. 특히 기념식에서는 그동안 본교에서 10년 동안 근속하신 심상보, 이종만, 이석권, 문천석, 오창옥, 최우근, 김찬도 교사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제7회 전(全)인천 초등학교 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7월 6일에는 제1회 경기도 아동미술실기대회를 실시하여 경기도 지역사회의 예․체능 방면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술실기대회에는 3,971명의 꼬마 화가들이 참석하였으니, 그 대회 규모가 얼마나 크고, 본교가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환영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날은 찌는 듯한 날씨였는데 더위도 모르고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려가며 채색에 여념이 없는 아동들의 모습이 귀엽고 대견스러웠으며, 학부형들도 교문에서 문전성시를 이루며 손에 땀을 쥐고 성원하였다. 이 대회의 입상자를 보면 금상이 박문국민학교 길영희 등 12명, 은상이 63명, 동상이 358명이었다.
기념식을 끝내고 그날 오후 7시 30분부터 최신시설을 갖춘 강당에서 국내 유명한 성악가들이 출연하는 음악제가 김찬도, 임주택 교사의 지휘로 거행되었다. 특히 제2부 순서로 「판자촌 점경」이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려서 많은 시민과 타교 학생들에게도 예술제의 멋을 만끽하게 하였다.
제 1 부 음 악
제 2 부 연 극
또, 당시 기념식에 많은 귀빈들의 축사와 기념사가 있었는데 당시 「동산학보」(제 61호)는 개교 25주년을 사설로 축하하며 10년 근속표창을 받으신 선생님을 다음과 같이 정겹게 소개하고 있다.
― 개교 25주년 기념일을 축하한다(「동산학보」제 61호)―
1960년대에는 사회의 여러 개혁을 겪으며 많은 경제계획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모든 국민들이 참여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천지역은 많은 피난민과 함께 지방에서 모여든 영세민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하여 인천지역의 학력은 당시 어느 지역보다 매우 높았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복과 교모 등을 물려받았고 낡은 책가방 속엔 알뜰한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특성은 본교의 학생 실태 조사에서도 역력히 나타난다.
학생들의 본적별 통계를 보면 인천에 본적을 둔 학생은 과반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중․고등학교 각각 전교생의 연령별 차이도 크게 나타난다. 학생 취미나 특기의 분포는 본교의 자랑인 넓은 운동장과 특별활동을 통한 전인교육의 영향으로 모든 방면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는 당시의 특별활동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해방 이후 여러 차례의 입시제도 개혁을 거치면서 중학교 입시제도는 1961년에 공포된 「중학교 및 대학의 입학에 관한 임시 조치법」에 의거, 1962년부터는 국가고시제를 실시하였다. 이 국가고시제는 1963~65년까지 시ㆍ도별 공동출제로 바뀌었고 1966년부터는 학교장 단독출제 형태와 교육감 책임하의 공동출제 제도가 병행되었다.
당시에는 입학시험 경쟁이 날로 심해져 국민학생들도 입시준비에 시달리게 되고 또한 일류학교에 대한 집념으로 학교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러한 병폐를 해소하기 위하여,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문교부의 발표는 당시의 학생, 교사, 학부모 등 온 국민의 열망적인 환영을 받으며 1969년 서울에서 처음 실시되고 1970년도에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전주 6개시에 적용되고 1971년도부터는 전국에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 2월 3일 인천지역에서 첫 무시험 추첨이 시행되었다. 인천시내와 부천군, 강화군, 옹진군 3개군에 중학교가 없는 도서의 졸업생을 포함한 50개의 국민학교를 한 학군으로 묶고, 부평지구 11개 국민학교를 다른 학군으로 묶어 중학교 신입생을 배정하였다. 이리하여 본교도 그 해에 10학급 600여 명의 신입생을 배정받았다.
중학교 무시험제도는 아동 심신의 정신적 발달 촉진, 국민학교 교육의 정상화, 가정의 교육비 부담 감소 등의 효과뿐만 아니라 중등교육의 기회 곧 진학률을 급격히 상승시켰다. 또한 모든 중학교의 시설, 재정, 교원, 기타 교육조건 등이 차츰 평준화 되어 갔다.
제1절 정치·사회적 배경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연장이었지만, 1972년 12월 27일 개정·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해 제4공화국으로 불리어지며, 경제는 괄목할만하게 성장하였지만, 민주주의는 퇴보했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학교교육이 정치·사회·경제 등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흔히,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특히 입시제도)이 달라진다고 여기고 있을 정도다. 하물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유신정권 하에서의 학교교육은 정치적 배경이 상당히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배경과 관련한 당시 학교교육의 특징을 거론한다면, 첫째로 국민의 주체성을 강조하여 소위 ‘국적 있는 교육’을 출범시키고 국가안보를 도모한다는 <안보교육>을 들 수 있다. 학생군사교육(교련)과 학도호국단 부활이 한 예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잘 살기 위한 실천운동으로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병행하여 과학ㆍ기술 교육을 진흥시켰다.
‘애국애족’이나 ‘효’ ‘충성심’ 등이 강조되고 좀 더 잘살기 위해 ‘근검절약’해야 한다는 논리가 부정적 가치일 수는 없겠지만, 그 이면에 정권이나 체제를 유지하고 연장하려는 불순한 목적이 개입되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당시 학교교육은 불순한 의도에서의 정권 홍보용으로 이용된 측면 또한 없지 않았다. 국가(문교부나 교육청)에서 내린 지침이나 교육내용을 비판하고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학교가 있겠는가? 학교교육의 지침은 모두 ‘법’에 근거를 두고 시행되기 때문에 교육내용이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단할 여지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의 동산은 그렇게 절대권력의 정부에서 강력하게 지시하는 대로 학교교육을 시행했다고 여겨진다.
(1) 교련교육(敎鍊敎育)의 강화
1971년 12월에 선언한 국가비상사태에 즈음하여 문교부에서는 교육의 기본방침으로 안보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에는 장학방침의 기본목표를 안보교육체제의 강화에 두고 고등학교 학생에게도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본교에서도 교련시간을 통하여 총검술, 사격훈련, 행군훈련 등이 실시되고 교련실기 경연대회, 격전지 대행군 등을 실시했다. 특히 인천지역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해마다 ‘교련실기 경연대회’를 실시하였다 이 대회에는 1개 소대규모의 학생들이 총을 지닌 상태로 4km를 뛰는 구보시합 등 학생들에게 벅찬 훈련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 대회의 상위 입상을 위하여 학교에서는 한 달 이상을 학과 수업을 단축한 채 오랫동안 특별 훈련을 해야만 했다.
또한 매월 2회씩 ‘교련 조회’를 실시하여 학생들은 이를 위한 연습으로 교련복에 교모, 탄띠, 각반 등을 착용한 채 방과 후에도 남아야 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의 안보강화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련복을 갈아입고 각반을 허겁지겁 차고 뛰어나가 교련 교사의 호령에 따라 총검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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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공소년대(反共少年隊) 조직 운영
안보강화 정책에 따라 본교에서도 「반공전위대」등 여러 조직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조직 중 가장 대표적인 「반공소년대」 및 「방공단」의 조직과 운영 등을 소개한다.
□「반공소년대」
1) 조직인원: 중·고 학급당 2명 계 84명
2) 반공소년대 지도를 위한 교사 1명 배치
3) 각 활동부는 부장학생 1명과 10명 내외의 부원으로 조직
4) 총회를 월 1회, 부장이상 간부회의를 월 2회하여 월별 계획을 결정하고 활동 결과를 분석ㆍ평가
(3) 새마을 교육의 추진
1970년대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생활개혁운동이며,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개혁운동이었다. 새마을교육은 국민교육의 이념 아래 학교교육을 통하여 학생과 향토사회 주민들에게 근면ㆍ자조ㆍ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함양하고 이를 우리 민족의 국민성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향토개발과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실천적인 인간을 육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문교부에서는 1972년 이래 장학방침으로 계속하여 새마을교육의 심화와 새마을정신의 생활화를 통하여 새마을교육을 실시해 왔다. 이에 본교는 「새마을 추진계」라는 담당부서를 설치하고 애향단을 조직하여 교육과정을 향토화하고 「어머니 교실」을 운영하여 성인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등 새마을교육을 심화시키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였다.
(4) 교육과정의 개정
중등학교의 교육과정은 과거에는 교과활동, 특별활동, 반공ㆍ도덕생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 데 비하여 새 과정에서는 반공ㆍ도덕생활을 교과활동에 포함시킴으로써, 교과활동과 특별활동의 영역으로 나누어 단순화시켰다. 즉 새 교육과정 개정의 근본취지는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구현을 기본방향으로 삼고, 국민적 자질의 함양, 인간교육의 강화, 지식ㆍ기술교육의 쇄신을 기본방침으로 하여 소위 ‘국적 있는 교육’을 실현하려는 정권의 의도에서 이룩된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1974년 12월 31일에 개정ㆍ공포되었는데 교과활동은 필수 및 필수선택 교과목과 선택 교과목으로 나누었다. 교과는 국민윤리ㆍ국어ㆍ국사ㆍ사회ㆍ수학ㆍ과학ㆍ체육ㆍ교련ㆍ음악ㆍ미술ㆍ한문ㆍ외국어 및 실업ㆍ가정에 관한 교과와 기타 문교부장관이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교과로 편성된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 편제의 큰 특징은 학생들의 진로선택에 따라 과정별 선택과정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각 과정은 학생들의 진로선택에 따라 2학년부터 인문ㆍ자연 등으로 구분하여 편성하였다.
다음은 교육과정 개정 직후 1975학년도 본교의 교육과정 시간배당이다.
1970년 2월 3일에 처음 실시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에 이어 1975학년도에는 인천지역의 고등학교도 연합고사 실시에 의한 평준화가 시작된다.
이는 교육환경 면에서 볼 때, 종전 후 안정기에 급격히 출생률이 증가한 세대가 중․고등학교 학령기에 접어든 것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학생 수가 격증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무시험 전형과 평준화 시책에 의해 전국적으로 학교 수 또한 매우 증가했고, 경제성장에 의해 교육여건이 상당히 개선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평준화 정책에 따라 동산은 타 학교와 똑같은 학력으로 신입생을 배정받아 새롭게 발전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중등교육에서 평준화시책의 추진은 1970년대의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였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입시제도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평준화시책도 고교 입시제도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
고교 평준화정책은 평준화 지역 고등학교의 교원ㆍ시설 등의 교육 조건을 평준화하여 학교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고입 선발고사 추첨배정제도를 실시하여 입시 위주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유도하였다.
입시제도 개선의 기본 방향으로는
① 교육 정상화의 촉진
② 고등학교의 평준화
③ 실업 및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④ 지방학교의 발전 조장(助長)
⑤ 교육비 국민부담의 절감
⑥ 학생 대도시 집중 억제 등을 들었다.
이러한 입시제도의 구체적 방안은 다음과 같다.
70년대 교육의 이념은 민족주체성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에 국적 있는 교육이 강조되었는데 구체적인 실천활동으로 민족중흥관의 설치, 국기교육, 국어순화운동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972년 유신체제의 출범은 교육에 있어서 유신교육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 우리의 국가 현실에 알맞은 교육이 강조되었다.
국가에서는 총력안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고등학교 학생에게 안보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자들을 상대로 국력배양, 최근의 국제정세들을 주제로 많은 연수회를 개최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1975년 5월 20일 전국 고등학교 이상의 학생과 교원으로 구성되는 「학도호국단」을 창설ㆍ발표하였다.
이에 각 고등학교에서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어 교련 및 교육시범, 교련실기 경연대회, 격전지 대행군 등에 참가하게 되고 또한 수시로 개최되는 ‘반공결의대회’와 궐기대회 등에 학과수업을 미룬 채 참가하였다. 본교는 연대급으로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이전의 학생회 기구의 특별활동부서의 모든 행사는 학도호국단의 명칭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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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동산의 자랑 교지(校誌)「東山」
학교에 있는 사람 - 학생이든 선생님이든 - 이면 누구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좋은 학교’이기를 갈망한다. 아니, ‘좋은 학교에 가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좋은 학교’의 요건은 무엇일까? 외부로부터는 ‘명문(名門)학교’라고 일컬어지고, 스스로 ‘좋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좋은 학교를 졸업했다’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할 것이다.
이른바 일류 대학에 많은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인가? 졸업생들 중 사회 각계각층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교육환경은 현대적이고 쾌적한가? 인성교육은 잘 되고 있는가? 선생님들은 학생교육에 열의가 있고 사랑으로 헌신하는가? 학생들 간에 서로 인화하고 학교폭력은 없는가?
학교도 생로병사(生老病死)하거나 진화(進化)하는 하나의 생명체와 같은 것은 아닐까? 과거에는 명문이었던 곳이 어느 순간 이름이 잊혀지는 곳도 있고, 문제 학교 또는 무명의 학교에서 문득 명문학교 또는 일류학교로 거듭난 곳도 있다.
동산인들도 개교 이래 ‘명문(名門)’을 추구하며 부단한 노력을 해 왔을 것이다. 학생들이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땅 한 평, 벽돌 한 장에 피와 땀을 흘리신 분들, 실력 있고 덕망 있는 선생님을 모시고자 노력했던 분들, 교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신 선생님들 모두 명문사학(名門私學) 대동산(大東山)의 모습을 있게 한 분들이다. 그리고 학생들 또한 동산을 명문으로 만든다.
학업성취도면에서 우수하거나, 예체능 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거나, 각종 대회에서 좋은 실적을 드러내는 학생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재능이 뛰어나서 이룩한 결과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서 이루어 낸 것일 때 그 가치가 영원하지 않을까? ‘청룡기 3연패의 영광’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여기서는 1950년대 이전에 창간되어 1970년대로 이어져 오며 그 빛을 발해왔던 교지(校誌) ‘東山’을 주인공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50년대까지는 언급했기에 그 이후 면면히 이어져 온 교지의 모습을 언급한다.
교지는 동산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고,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감대요 나아가 모든 동산인의 결속을 돈독히 해주는 매개체였다.
또한 70년대에 들어서는 교지 『동산』은 인천시교육회 주최 학교문집 경연대회 ‘최고상’을, 중앙일보사 주최 전국 교지 경연대회에서 ‘가작’을, 건국대학교 주최 교지 콘테스트에서 우수상(1775)을 수상하여 동산의 명예를 대외적으로 빛나게 하였다.
교지발행은 문예부 담당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문예부 학생들이 편집하고 인쇄는 1970년대부터 민중서관에서 담당하였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교지 『동산』이 공교롭게도 1975년 제19호가 간행되었다가 근 20년 뒤인 1994년 복간되었고, 다시 개교 60주년을 맞아 1998년 21호가 간행된다. 이제 2008년 개교 70주년을 맞아 간행하게 되는 22호를 ‘재 복간호’로 명명해야 할 지경이니 그동안 교지의 명맥을 이어 오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앞으로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해마다 교지가 간행되기를 소망하고 또 다짐한다.
또, <동산학보>라 하여 지금의 <새동산>과 같은 소식지가 1964년에 63호가 발간되었다는 근거를 『동산』 제 11호에 실려 있는 글(고3, 윤을병) 속에서 발견했다. 지금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만, ‘새동산’과 ‘동산문화’로써 <동산학보>를 계승하고 있는 듯하여 한편 위안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