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의 탄생

  • 1945년 학교 일지 1945.02

    1945년 학교일지

    월 일 주요 내용
    1945 01. 15. 설립자 초대이사장 최승우 선생 서거
    08. 15. 인문 중학 과정으로 개편(수업실시)
  • <전시교육령> 1945.05.21

    제1조 학도는 진충으로써 국운을 쌍견에 지고, 전시에 긴절한 요무에 정신(挺身)하여 평소에 단련한 교육의 성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동시에 지능의 연마에 노력함으로써 본분을 삼는다.

     

    제2조 교직원은 솔선수범하여 학도와 함께 전시에 긴요한 요무에 정신하는 동시에 구학구진으로써 훈화계도의 임무를 완수한다.

     

    제3조 식량증산, 방공방위, 중요연구 등 전시에 긴절한 요무에 정신하는 동시에, 전시에 긴절한 교육훈련을 실행하기 위하여, 학교마다 교육과 학도로써 학도대를 조직하고, 지역마다 학도대로써 연합체를 조직한다.

    교육을 전쟁수행의 수단으로 이용하려한 점은 ‘조선교육 3대 강령’에도 나타난다.

     

    첫째는 국체명징(國體明徵)이었다. 이것은 황국신민 교육의 지도과정이며 일제 구국의 이상이기도 하였다.

     

    둘째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신애협력(信愛協力)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경애하고 서로 신뢰함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인고단련(忍苦鍛鍊)인데 사물을 가볍게 보지 않는 진지한 태도로 고행이나 어려운 일을 실천하는 힘을 길러 황국신민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전쟁수행을 위해 식민지 조선인을 기만하려는 술책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국어-일어-상용(日語常用)의 한 예를 들면, 학교에서 학교장의 도장을 찍은 8장의 작은 쪽지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주고 우리말(조선어)을 한 번 사용하면 도장 찍힌 종이 한 장씩을 빼앗는다. 8장이 전부 빼앗기면 정학, 다시 한 번 8매를 타서 또 다 빼앗기면 퇴학이 되었던 것이다.

    궁성요배는 동쪽(일본황궁)을 향해 45° 각도로 절하는 것이고, 황국신민임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를 매일 조회 때마다 큰 소리로 제창하게 하였다.

      당시의 학도들은 남녀, 초․중등을 가리지 않고, 정규수업을 하지 않고 근로보국이라는 미명아래 작업장에서 전시물자 증산을 위한 노동 - 방공호 파기, 저수지 못 파기, 산의 나무벌목 등에 동원되었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어쩌면 우천시에만 수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은 이 때 <인천공업전수학교>의 졸업증서다.

     

     

      이런 상황에서도 재단법인은 학교발전을 위해 1944年 5월 16일에 인천실업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게 된다.(학제 103호, 조선총독부 관보 5,260호)

      이사장은 최승우(崔承祐)선생, 이사는 김경진(金慶眞)선생, 김종섭(金鍾燮)선생, 김영배(金英培)선생, 深見寅市선생이며, 감사는 이해방(李海昉)선생, 김세완(金世玩)선생이시다.

     

      그리고 1944년 7월 4일에 재단법인 인천실업학원은 인천지청 제5호에 등록을 완료했는데, 재단과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시던 설립자 겸 초대이사장인 최승우선생께서 광복을 몇 달 앞 둔 1945년 1월 15일 서거하시니, 학교에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제7절 일제시대 학교교육 및 사학(私學)의 수난 1945.06

     (1) 학생활동의 규제와 사학의 수난

      식민지 시대의 학생활동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지만 1937~1944년의 기간에는 더욱 심하였다.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고 우리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다니던 여학생들에게는 검정 세루양복에 흰 칼라를 다는 제복을 강요하더니 그 후 ‘몸빼’로 바꾸어 입도록 하였다.

     

      1938년에는 학교에 군가를 보급하도록 지시하여 숭무정신(崇武精神)을 노래로써 고취시키려고 하였다. 동년 4월에는 모든 사립학교에 기존의 교기, 교가, 응원가 등을 황국 일본의 입장에서 표시하도록 강요하니 사립학교들은 교가를 일본말로 부르게 되었다. 또 학생집회에서 많이 부르던 ‘朝鮮의 노래’(玄濟明의 ‘대한의 노래’)와 ‘봉숭아’는 말썽이 되어 금지곡이 되었다.

     

      또, 음악반 학생들의 모든 악기를 빼앗아 갔으니, 악기 대신에 총검을 들게 하고 오케스트라 연습기간엔 군가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영자신문을 폐간하고 기독교 교육과 의식은 전부 폐지시켰고 기숙사를 수시로 수색해 성경, 찬송가, 한국소설이 나오면 죄인 다루듯 하였다.

      1942년부터는 근로봉사란 이름으로 전력증강의 기형적인 길을 가게 되니 모내기, 타작, 비행장․곡사포 진지구축 등에 몇 개월씩 동원되었고, 송탄유(松炭油) 채집을 강요하였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2) 사립학교 설립 불허

      당시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이 적어 소수의 지원자밖에 수용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허가하려 들지 않았다.

      본교처럼 지방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면 이를 공립학교 또는 실업학교로 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허가를 불허한다는 방침이었다.

     

    (3) 한국인교사의 축출과 한국어 사용금지

      일제는 사립학교의 한인 교장을 축출하고 일본인 교장을 두게 하거나 일인 교두(敎頭)를 보내어 강제로 학교의 실권을 쥐게 하고 교내를 감시, 그들의 방침대로 교육을 강행하였다. 또한 한인교사를 여러 가지 이유로 해임하고 그 대신에 일인교사를 채용, 일본식 학교 만들기에 광분했다.

     

      1938년 개정 교육령에 의하여 한국어과는 필수과에서 수의과(隨意科)로 하였으니, 곧 학교교육에서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내에서는 물론이요 교실 밖에서도 학생들끼리의 한국어 사용을 금하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벌을 주고 여러 차례 거듭하면 정학․퇴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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