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의 탄생
1939년 학교일지
년 | 월 일 | 주 요 내 용 |
1939 | 02. 24. |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 인가(3년제 6학급 편성) |
설립자 : 김윤복, 김종섭, 김세완, 유군성, 이흥선 | ||
학교장 : 김영배 | ||
04. 01. | 개교식 거행 (1학년 입학생 120명, 교사 3명) |
(1) 인천상업전수학교 개교식
드디어 1939년 2월 24일 「인천상업강습회」는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 인가되어 3년제 6학급을 편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갑종학교는 아니지만 새로운 삶과 민족정기의 전수를 위한 기틀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仁川商業專修學校 設立認可書 學第 號
金允福, 劉君星, 李興善, 金世玩, 金鍾燮
昭和 十四年 二月 日附 申請 仁川商業專修學校 設立ノ件 認可ス
昭和 十四年 二月 二十四日(1939年) 京畿道知事 甘蔗義邦 |
설립위원들은 인천상업강습회 시절부터 학교설립에 온 정열을 쏟아 일해 온 김영배선생을 교장으로 추대하고 1939년 4월 1일 율목동 소재 무덕관에서 개교식과 함께 선발된 신입생 120名의 입학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민족자본으로, 자주민족의지를 지닌 순수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인천 최초의 을종 정규학교 설립이 이루어져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위한 중등교육 시설이 처음으로 인천에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때 가르친 과목은 수신(修身)․조선어․일어․국사․산술․지리․이과․직업․체조 등이었다.
(2) 교지(校地) 마련을 위한 노력
학교가 설립되었으므로 교사(校舍) 건립이 당면과제였다. 교장인 김윤복선생이 중심이 되고 세부기획은 사업가인 김종섭선생, 섭외와 법률적인 문제는 법조계 중진인 김세완선생이 맡았는데, 특히 김세완선생은 매사에 과묵하고 양보하는 미덕을 살려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실업가인 이흥선(李興善)선생과 유군성(劉君星)선생을 포함한 설립위원 다섯 분이 사재(私財)를 거두어 9,000원을 마련하여 교사(校舍)를 짓기 위한 교지(校地)를 마련하는 기금으로 확보하였다. 기금이 마련되자 교지(校地)를 조성하기 위한 대지(垈地)를 물색하던 중 당시 논밭으로 되어 있던 송림동 47번지 일대의 토지가 적합한 장소로 판단되었다. 앞으로는 안송림(현, 송림2동)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시내 중심지에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고 뒤쪽에는 부처산 또는 부채산이라고 불리우는 낮은 산이 있으며(부처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 돌부처 88개가 안치되어 있었으며 일본 절이 있었기에 붙인 이름이며, 부채산은 산등의 모양이 부채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산에는 잡목이 들어서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간에는 일본인 북포씨(北浦氏)가 경영하던 과수원이 있었으므로 한적하면서도 다정한 형태를 지닌 산이 이루어져 있었기에 校舍를 신축할 경우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었다. 또 남쪽으로는 넓은 시야를 지니고 있어서 학교부지로 적합하다고 결정하였다.
장소를 선정한 설립위원들은 대지를 매입하려고 소유주를 알아본 결과 일본인 중환일평씨(中丸一平氏)로 되어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가 매매를 청하였으나, 조선인이, 더구나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대지를 매도할 수 없다는 완강한 뜻을 표명하였다. 일본의 정책에 위배되는 행동은 조금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방문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급기야 소유주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설립위원들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일본으로 찾아가 소유주를 설득하기로 결정하고 김윤복, 김종섭 두 분이 日本으로 건너가 동경에 거주하는 소유주를 만나 다시 설득하게 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두 분이 한 달 넘게 일본에 머물며 간청한 결과 드디어 토지매도의 승낙을 받고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매매가격은 평당 2원으로 전체 평수 3,000평, 합계 금액 6,000원으로 당시 시세보다 오히려 낮은 가격이었다. 김윤복선생과 김종섭선생의 정성과 의지에 감동한 중환일평씨(中丸一平氏)가 대금을 낮게 책정하여 매도하여 주었으며, 이후에도 교사설립에 많은 협조를 해 주었다.
(3) 교사 신축과 67人의 성금
이제는 교사(校舍) 신축(新築)이 과제였다. 교지(校地)를 마련한 설립위원들은 인천의 유지들을 방문하면서 우리나라 청소년 교육을 위한 교사신축의 필요성을 설득하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100여 명의 유지를 방문하고 교사신축을 위한 후원회의 역할을 맡아 주기를 간청한 결과 67명의 유지(有志)로부터 20,260원의 신축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정지작업을 실시하고 1차 6,698원을 투입하여 기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1년여의 공사 끝에 1940年 8月 10日 공사를 마무리 지어, 1940年 10月 25日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이루어진 교사(校舍)의 개요는 다음과 같으며,
교사(校舍)는 실당 33평씩 6개 교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무소는 교장실, 교무실, 숙직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낭하(廊下)는 교무실과 교사(校舍)를 연결하는 복도였다.
용 도 | 규 모 |
교사(校舍) | 연와조(煉瓦造) 이계(二階) 건평(建坪) 99평 외 이계(二階) 99평 |
사무소 | 목조와조평가(木造瓦造平家) 건평 54평 |
낭하(廊下) | 목조와조평가(木造瓦造平家) 건평 4평 |
변소(便所) | 목조와조평가(木造瓦造平家) 건평 10평 |
현재 중·고 교사(校舍) 사이 중앙 화단에 서 있는 ‘新築紀念’ 비문(碑文)의 앞면에는 당시 설립자 분들, 뒷면에는 신축기금을 기탁하신 분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4) 학교경영과 무도장 건립
교사(校舍)의 신축으로 송림동 47번지 시대의 막을 열게 되면서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1939년도 세입세출결산서를 통해 설립자들의 노고를 짐작해 본다.
또, 이흥선(李興善)선생은 학생들이 체력을 단련하기 위한 장소가 없음을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특별히 무도장을 신축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하고 사무실 옆에(현재 중학교 교무실 건물 자리) 건평 80평 목조 무도장을 신축하였다(1941년 5월 완공.)
이 무도장은 당시 인천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좋은 시설을 갖춘 것으로 학생들의 심신단련과 전체 모임 등 각종 행사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