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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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서한샘

직업 국회의원, 한샘학원 이사장

졸업회수 11회

졸업연도 1962년

주요경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문학박사

•동산고등학교 교사, 고려대, 경원대 겸임교수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이사장

•한샘학원, 한샘출판사 설립, KBS, MBC, CBS, EBS 교육강사

•한샘국어 등 30여 권 저술

•한샘문화장학재단 이사장

•한국중고배구연맹 회장

•예술의 전당 이사·운영위원, 대한적십자사 청소년중앙위원

•서울특별시 교육위원

•제15대 국회의원(교육위 간사)

•동산중·고등학교 9대 총동창회장 : 1999. 12. 11. - 2008. 3. 20. 재임,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교육·문화 부문(2008)

•2019.05.06 작고

남기는 글

[WEEKLY PEOPLE] 서한샘 박사, "청소년이여 꿈을 펼쳐라"... 서거 1주기 추모하며 - 2020.05.15

[한겨레] ‘밑줄 쫙∼’ 한샘학원 서한샘 전 국회의원 별세 - 2019.05.07

[기호일보] 서한샘 잎새방송 회장 - 2010.08.01

[경인일보] 서한샘 동산고총동창회장 모교에 장학금 - 2006.05.18

 

  서한샘 회장은 신윤하 회장이 총동창회장에 취임한 1996년부터 상임부회장을 맡아 동산총동창회를 주도해 왔다. 그리고 회장직을 맡은 8년간 동산총동창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큰 업적을 이루었다. 서한샘 하면 동산이, 동산 하면 서한샘 회장이 떠오를 만큼 서한샘 회장은 동산과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인연으로 맺어 있다.

  서한샘 회장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모교의 국어 교사로 부임하여 후배들을 제자로 가르쳤다. 교육의 길로 매진한 서 회장은 학원가로 진출하여 한샘학원, 한샘국어로 명성을 쌓았고, EBS 교육방송을 통해 ‘밑줄 쫙-’ 선생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1996년에는 인천 연수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가의 교육 발전에 헌신했다. 서 회장은 동산중·고교 6년간 모교에서 받은 장학 혜택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총동창회 장학 사업에 더욱 열심이었다.

  서 회장이 총회장을 맡은 8년 동안 사무국장으로 헌신한 사람은 제자인 김선태(고 21회) 동문이다. 김선태 사무국장은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을 동산총동창회와 함께 보냈다. 8년을 무보수로 사무국장직을 수행하면서도 항상 최선을 다한 김선태 사무국장을 서한샘 회장은 지금도 고마워한다. 다음은 김선태 사무국장이 8년간의 동창회 일을 간략히 정리한 내용이다.

 

 

▶ 일 년 행사를 정례화하다

  서한샘 회장은 총동창회의 일 년 행사를 완전히 정례화해서 각 담당 기수들이 실천하도록 하였다. 총동창회는 1월에 임원들 부부 모임을 먼저 가져 시무식을 대신한다. 우정을 다지고 부인들의 친목도 다지기 위함이다. 그래야 일 년이 순조롭다. 2월 말쯤 각 기수 회장단 및 산하단체장의 상견례가 있어 서로 우정을 다지고 3월에 총동창회 정기총회가 열린다. 총동창회는 언제나 로얄호텔(노명선, 9회)에서 열렸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총동창회의 가장 보람 있는 행사인 장학금 수여식이 성대하게 열린다. 서한샘 회장은 ‘동창 1인이 후배 1명 장학금 주기’운동을 2001년부터 펼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동산의 아름다운 전통을 마련했다. 5월 초에는 동산중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주최하고 각 기수가 돌아가며 개최하는 초중야구대회가 열리고, 8월에는 총동창회장기 쟁탈 동문야구대회가 약 20기수가 참가하여 두 달에 걸쳐 개최된다.

  10월 달에는 모교 운동장에서 전 동문이 참여하는 연합체육대회가 열리고, 동산고⋅인천고 야구동문 OB전도 열리고, 11월에는 각 기수가 돌아가며 개최하는 ‘졸업 30주년 기념 사은회’가 열린다.

  그리고 12월 초에는 1년을 마무리하는 ‘동산인의 밤’이 로얄호텔에서 성대하게 열려「자랑스러운 동산인상」을 수여해 드린다. 특히 ‘동산인의 밤’ 행사에는 1년에 한 번 총동창회보 책자가 두툼하게 발간되는데, 그 책자에 1년 행사를 낱낱이 정리하여 기록물로 남겼고, 총동창회에 공헌한 모든 동문도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했다. 책자 발간에는 김효식 홍보부장(고 22회)의 공로가 각별했고 총동창회 사무국장을 지낸 김영일(고 17회) 동문이 경영하는 영일기획에서 발간하였다.

  서한샘 회장은 동창회 조직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동산 전 동문 기수회를 5등분하여, 전수 1회~고 10회까지 大10기수, 고 11회~20회까지 東10기수, 고 21회~30회까지 山10기수, 고 31회~40회까지 信10기수, 고 41회~50회까지 義10기수라 명명하여,「大, 東, 山, 信, 義」각 10기수씩으로 묶어서 활성화하였다. 山10기수(21회~30회), 信10기수(31~40회)는 회장단 모임이 따로 조직되어 있어 정례적 모임을 가지며 기금도 마련해 두었다.

 

▶ 7년간 7억 6천 5백만 원, 526명에게 장학금 전달

  선배가 후배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장학금 주기일 것이다. 서한샘 회장은 “선배 1인이 후배 1인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자.”고 주창하였다. 이 운동에 모두들 호응하고 나섰고, 첫해인 2001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중고 재학생 58명에게 1년 등록금 전액을 장학하여 7천만 원을 전달했다. LA동문회, 동산로타리클럽, 동산라이온스클럽, 동산골프회, 민초회, 소성산악회를 비롯하여 홍콩에서 사업하시는 최영우 동문(10회) 등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장학금을 보내주었고,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송기덕, 한정철, 이양훈, 신윤하, 서한샘 회장, 노명선 로얄호텔 회장, 10회 이승언 회장을 비롯하여 17회, 18회, 20회, 21회, 23회, 24회, 25회, 27회, 31회 동문들이 두루 참여해 주었다. 장학증서는 장학금을 주는 동문 또는 단체의 이름으로 그분들이 직접 수여해 더 뜻이 깊었다.

  2002년 5월 15일에는 놀랍게도 100명의 재학생에게 1억 3000만 원의 장학금을 수여하게 되었고, 인천교육청 사이트를 비롯해서 각 언론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신윤하(7회), 노명선(9회), 서한샘(11회) 회장이 전해에 이어 10명 1300만 원씩의 장학금을 냈고, 동산라이온스클럽 5구좌를 비롯해서, LA동문회 및 여러 단체, 각 동기회에서 장학금을 내주었다. 특히 정찬배(4회), 정형기(30회) 부자가 함께 1구좌씩의 장학금을 희사한 것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2003년 5월 15일에도 기적은 이루어졌다. 재학생 96명에게 1억3천5백만 원의 장학금을 수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신윤하(7회), 노명선(9회), 서한샘(11회) 세 분이 역시 10구좌씩 각 1400만 원을 장학금으로 냈고, 재경동문회, 강화 동문회, 시흥동문회, LA동문회, 동산로타리클럽, 동산라이온스클럽, 소성산악회, 동산골프회, 태권도동문회, 육상동문회, 교직원동문회, 민초회 등의 단체가 참여했고, 49명의 동문들이 1~2구좌의 장학금을 내주었으니 그 고마움을 어찌 표할까.

  2004년에는 78명의 재학생에게 1억1천만 원의 장학금이 전달되었고, 2005년에는 69명의 후배들에게 1억2천만 원의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2006년에는 61명에게 1억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였고, 2007년에는 55명에게 9천1백만 원을 전달하여 7년 동안에 526명의 재학생들에게 7억6천5백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하였으니 모교 사랑, 후배 사랑으로 등록금 한 번 더 내기를 몸소 실천하신 선배, 후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릴 뿐이다.

  이러한 대규모적인 장학 사업은 다른 학교에서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우리 동산만의 자랑이며 전통이 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장학법인 동산동문장학재단이 되었다.

 

▶ 동산인의 밤, 자랑스러운 동산인賞

  해마다 12월에 거행되는 ‘동산인의 밤’은 총동창회로서는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이다. 1년을 마감하는 이 행사에서 그 해에 뽑는 ‘자랑스러운 동산인 賞’을 수여해 드리는 것이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 행사는 8대 회장인 신윤하 회장님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보통 한 해에 세 분을 선정해 드렸는데, 선정된 분에게는 특별한 옥돌상패와 행운의 황금열쇠를 증정해 드렸다.

  ‘동산인의 밤’ 행사에는 동산을 대표하는 가수 유심초(유시형(19회), 유의형(21회), 백영규(19회) 동문이 기쁘게 식전행사를 장식해 주었고, 공군대령 출신인 윤양로(22회) 동문의 색소폰 연주가 일품이었다. 동문 부인들로 조직된 밸리댄스팀의 공연도 흥겨웠다.

 

▶ 전체 동문을 단합시키는 동문연합 체육대회

  2007년 10월 14일 청명한 하늘 아래 모교 운동장에는 전수1회부터 고40회까지 800여 명의 선후배들이 참석하여 흥겨운 동문연합체육대회가 열렸다. 각 기수별로 색색의 텐트가 즐비하게 쳐진 것도 장관이었고, 어부인들이 마련한 먹을거리장터도 흥을 돋우었다.

  원래 이 체육대회는 산 10기수(21회~30회)의 체육대회였는데, 서한샘 회장이 이왕이면 전 동문의 체육대회로 확대하자 하여서 동문연합체육대회로 승격된 것인데, 이제는 총동창회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푸짐한 상품이 골고루 자녀들에게 나누어지는데 특히 자전거가 인기였다.

  약 2달간 치러진 동문야구대회 결승전이 이날 열리는데, 그 동안에는 21회, 27회, 28회, 30회, 31회, 35회, 38회 팀들이 강력한 우승후보들이었다. 김효식 홍보부장(22회), 김재수 총무부장(24회), 김우찬 체육부 차장(30회), 최천호 홍보부 차장(31회) 등이 특히 고생을 많이 해 주었다.

 

▶ 각 기수가 차례로 주최하는 초․중 야구대회

  인천에서 개최되는 초․중등 야구대회는 동산과 인고가 주최하는 두 대회가 유명하다. 동산 총동창회가 주최하는「인천광역시 초․중 야구대회」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그 역사에 쏟은 동산 동창들의 열정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 야구대회는 총동창회 주최라고는 하지만 각 기수가 돌아가면서 차례로 주관하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다. 각 기수는 자신들의 차례가 되면 1년 전부터 초중야구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대회에 드는 모든 비용, 팸플릿, 감독자 회의, 초청장 발송, 행사 3일간의 진행, 찬조금․광고금의 수금 등 모든 일을 수행한다. 그렇게 하면서 각 기수의 친목을 돈독히 하고 기금도 마련하며, 모교에 장학금이나 야구용품을 전달하기도 한다.

 

▶ 동산 야구의 감격, MVP․신인왕 금자탑 이룬 류현진 배출

  2005년 총동창회 10대 뉴스 중 첫 번째는 단연「청룡기쟁탈 전국야구대회 우승」이었다. 총동창회에서는 서울에서 열리는 야구대회에 동산팀이 올라가기만 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동대문 운동장에 모여 열렬히 응원전을 펼치곤 했다. ‘시정 순대(29회)’에서 푸짐한 안주를 준비해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청룡기 야구대회는 동산과 각별한 관계가 있는 대회였다.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하는 최고 권위의 대회인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동산은 1955년, 1956년, 1957년(3연패, 청룡우승기 영구 소장), 1959년, 1967년, 2005년 6번 우승했다. 특히 2005년 우승은 창단 60주년을 맞이하는 동산고 야구팀이 제60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여섯 번째 우승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결승에서 맞붙은 대구고는 화력이 엄청난 팀이었다. 처음부터 조마조마했는데, 초반에 대량실점을 하여 8:0이 되었다. 류현진은 8강전에서 성남고를 맞아 17삼진을 속아내며 완봉승을 거둔 괴력의 투수였는데 너무 혹사당한 듯했다. 천신만고 결승전까지 올랐는데 모든 것이 허탈하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망신만 시키지 말아달라고 속으로 빌었는데, 웬걸! 4회 말에 최승준 선수의 홈런으로 8:2, 6회 말에 8:6하더니 8회 말에 대거 4점을 뽑아 8:10으로 역전시키는 것 아닌가. 상대방 에러에다 홈런까지 마구 쏟아지니 이런 극적인 역전승도 있는가. 침울했던 동문 응원석은 갈수록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고 종국에는 광란의 분위기까지 연출되었다.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현천웅, 우수투수상에 류현진, 타격․타점․홈런상에 최승준 등이 매우 빛났다.

  총동창회에서는 즉시 우승 축하연을 성대하게 베풀었고 우승 축하 회보도 발간하였다. 류현진 선수의 아버지 류재천 씨도 동산 24회이니 동산 출신 부자의 동산 사랑은 또 얼마나 큰지……. MVP․신인왕이 된 후 기념품을 돌렸고, 금년에도 동산야구부에 장학금과 초등야구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야구배트, 글러브를 희사했으니 감사하고 뿌듯할 따름이다.

  이 외에도 2001년, 200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황금사자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하였고, 그 때의 특급 투수 송은범(52회)은 현재 한화프로야구단의 중심 투수이다. 2004년에는 대구매일신보가 주최하는 대붕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였고, 2003년 제 1회 미추홀기 전국 고교야구대회, 2005년 제 3회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 감동적인 행사, 졸업 30주년 사은회 잔치

  동산 각 기수 동창회가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행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초․중 야구대회 개최와 졸업 30주년 기념 사은회 개최이다. 40세가 넘으면서 본격적인 기수 동창회를 만들어 초․중 야구대회를 개최하게 되고, 50세가 다 되어 졸업 30주년 사은회를 개최하게 되니 7년을 두고 거행되는 두 행사가 동기회를 든든하게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 기수들은 내실이 있고 감동적인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동창들은 부부가 함께 참석했고, 백발이 성성한 은사님들에게 큰 절을 올리고 선물을 드린다. 은사님들의 모임인「동산사우회」에도 성금을 드린다. 이 행사에서는 30년 전의 앨범 사진이 영상으로 재현되어 옛 추억에 젖게도 하였고 작고하신 은사님들과 동기생들의 영정도 영상으로 비춰져 모두를 숙연하게 하기도 하였다. 26회 주최 사은회에서는 대한민국 대표 탤런트 박상원 동문이 은사님 모든 분들에게 양복 한 벌씩을 선물해 드렸고 동기회장 서경석의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소개되어 인기검색 십만 여건을 상회하는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동산은 나의 어머니 학교다

 

총동창회 고문 서 한샘(11회)

 

  모교(母校) - 어머니 학교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치면 동산(東山)은 진정 나의 모교다. 내 성장기의 텃밭이 동산이었고, 내 운명의 결정도 동산이었고, 내 삶의 가장 큰 영향도 동산에서 받았다. 이제 그 이야기를, 내 삶을 정리하는 뜻에서 풀어 놓는다.

 

  1950년 6월 25일, 한민족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때 나는 동명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 갔고, 굶주림과 질병과 고통과 슬픔만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런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전쟁 뒤의 상처도 아물어 가면서 중학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우리 때는 중학교 진학 시험이 있었다. 나는 운동장이 넓은 학교, 장학금도 많이 준다는 학교, 동산중학교에 끌렸다. 나는 동산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다. 1956년 3월, 입학 첫날 나는 중 1학년 3반에 배정되었고, 담임이신 문송록 선생님은 나를 임시 반장으로 지명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입학시험에서 전교 3등을 했기 때문이었다.

  동명초등학교 때 나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반장이 된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사건이 내 일생의 운명을 만드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반장이 되었으니 어찌 되었건 아이들을 통솔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 반 1등이었으니 남에게 1등을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세월을 보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중3 담임이신 장국선 선생님은 동산고등학교 진학을 강권하셨다. 장학금을 보장한다는 말씀에 나는 결국 동산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나는 전교 2등으로 입학해서 장학생이 되었다.

  고교 2학년 때인 1960년 4․19가 터졌다.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죽고 다치는 그 와중에서 나는 데모에 앞장섰다. 수업을 하다 말고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운동장 조회대 앞에 연좌하여 구호를 외쳤고, 나도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을 했다. 호되게 야단치시는 물리 선생님께 나는 마구 대들던 기억이 난다. “불의를 보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 분이 선생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말리십니까?” 그때의 치기(稚氣)를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계엄령 하의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동산 학생들의 의기는 대단했다. 학교는 그날로 휴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인천 시내를 헤매며 거의 매일 데모대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결국 인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혔고, 김세환 교감선생님이 오셔서 시말서를 쓰시고야 풀려났었다.

  나는 동산고등학교에서 리더십을 배웠다. 우리 때는 청소년적십자단(JRC–나중에 RCY로 바뀌었다) 활동이 매우 강했고, 학교 간부들이 JRC단원으로 활동했다. 나도 우리학교 JRC단장을 맡았다. 후에 경기도 JRC협의회 회장도 맡았고(그때는 인천이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전국 JRC협의회 부회장으로도 뽑혔으며 윤보선 대통령 때 전국 학생대표의 자격으로 청와대를 예방하기도 했었다(그때 청소년 부장이셨던 서영훈 선생님이 나중에 집권당 총재를 하셨다). 사라호 태풍 때는 경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원정을 가서 구호 성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나는 고2 때 학생회장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4․19의거가 성공한 직후여서 인천의 각 고등학교 회장단과 협의회를 만들어서 맹렬히 학생운동을 전개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활동했던 시절이지만 가정적으로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말 2월에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외아들인 나로서는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고 우리 반 친구들이 와서 함께 상주 노릇해 준 고마운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원래 편찮으셨던 어머님은 큰누이 집에 얹혀 지내시게 되었고 살던 집은 없어졌다. 아마 그때부터 내 떠돌이 생활은 시작된 듯싶다. 사촌형님 댁에 잠시 의탁해 있으면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는 듯하다. 신문팔이, 고철 줍기, 찹쌀떡 장사, 조개 캐기 등 고단한 일을 감당해야 했다. 나중에 오창옥 선생님의 주선으로 고2 때 입주가정교사 노릇도 했다.

  고3이 시작된 3월 초에, 나는 어느 반에도 배정을 받지 못했다. 성적이 떨어지자, 장학생이 되지 못했고 등록금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 배정 없이 떠돌이 공부를 보름 정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 두었어도 벌써 그만 두었을 것 같은데……. 남상협 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분은 백발이 아름다우신 분으로 우리의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분을 ‘백대가리’라고 부르곤 했다. 교장실에 들어서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서 군, 서 군이 그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네. 장학생으로 할 테니 등록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게. 나중에 반드시 성공해서 몇 배로 갚아야 하네.”

  그분의 특별 배려로 나는 동산을 졸업할 수가 있었다. 지금도 동산고등학교 등록금 수납부에는 내가 7기분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국어 선생으로 평생을 활동해오고 있지만, 고등학교 때는 이과생이었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나는 화공과를 선택했고 인하공대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등록금을 내고 들어가야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등록 마감일, 나는 소주 한 병을 뒷주머니에 차고 눈 덮인 문학산을 기어올랐다. 눈밭을 뒹굴며 한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던 그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못 했다. 그해 한 해는 죽음 같은 해였다. 공군하사관으로 지원해서 대전까지 갔다가 철조망 넘어 도망치기도 하고, 한 끼 밥을 위해 헤매기도 했다. 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어 자취방을 얻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그해 말 시험 때가 어김없이 다가와서 나는 절망적 기분으로 인천교육대학에 지망해 시험을 치렀다.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나중에 갚을 테니 누가 등록금 좀 주세요.” 그런 절규로 헤매던 시절이었다. 매형의 도움으로 겨우 등록을 하고 대학생이 되었지만, 내 갈망의 심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결국 석 달 만에 휴학하고 나는 삼수의 길로 들어섰다. “나를 보이리라.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내 스스로 확인해 보리라.”

  나는 서울대학을 가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무덤 같은 골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밤중에 아이들을 가르쳐 가면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생활했다. 나는 경제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등록금이 가장 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왕 선생을 할 것이면 학생들과 영혼이 부딪치는 국어선생이 되자고 하였다. 어김없이 시험철이 왔고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원서를 냈다. 442번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20명 모집에 364명이 응시했으니 18.2 대 1이었다. 유래 없는 경쟁률이었다. 나는 죽기 살기로 시험에 매달렸다. 그 시험에서 나는 과 수석으로 합격했다. 남상협 교장선생님께서 입학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주셨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방황은 계속되었으나 다행히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교사 배정을 받았다. 그러나 남상협 교장선생님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어서 동산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부임하여 만 4년을 봉직했다. 그 후 서울로 학교를 옮겼지만 내 모교를 항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야구시합이 동대문 운동장에서 있을라치면 열일 젖혀놓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우승을 하면 인천까지 함께 내려와 그 기쁨을 만끽하고는 했다.

  1996년 연수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을 때, 동산의 제자들, 선후배들이 없었다면 국회의원 당선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신윤하 회장님 밑에서 수석부회장 일을, 2000년부터는 총동창회장 일을 맡아 8년을 봉사했다. 동산중고등학교 6년, 선생으로 4년, 동창회 일로 12년, 모두 22년 세월을 동산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었으니 내 생애 전체가 동산과 직결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동산을 나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동산에서 배우고 동산에서 가르치고 동산에서 선후배와 함께 생활한 내 삶이 하나님 주신 은총임을 깨닫는다. 나는 동산중학교를 다님으로써 내 잠재능력을 일깨워 발휘할 수 있었다. 나는 동산고등학교를 다님으로써 지도력을 키울 수 있었다. 봉사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고,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동산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신의(信義)’라는 덕목을 배웠고 후덕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익혔다.

  “우렁찬 파도 소리 바위를 뚫네. 신의에 뭉쳐라 동산 학원”

  동산의 교가를 수없이 부르면서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바위를 뚫고 나아가는 인내와 용기를 배웠다.

  내가 후배들에게 조그마한 장학금이라도 기꺼이 주고자 하는 것은 동산에서 받은 장학의 뜻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7기분 등록금 밀린 것이 잊히지 않아 남상협 교장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내 삶의 멘토이신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정도 갚아가지고 되겠는가? 그때 준 장학금은 되돌려 받자는 것이 아니네. 그러나 잊지 말게. 자네가 장학금을 받았듯이 평생을 자네 도움 필요한 주변에 자네의 장학금을 나눠 주게. 그것이 장학의 근본 뜻에 보답하는 길이네.”

 

  나는 동산의 선생님들을 존경한다. 나는 동산의 선후배들을 사랑한다. 나는 동산의 야구를, 동산의 레슬링을, 동산의 태권도를, 동산의 육상을, 동산의 미술부를, 동산의 밴드부를, 동산의 문예부를, 동산의 산악부를, 동산의 RCY를, 동산의 모든 부서와 선후배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1938년 7월 14일, 그 암울한 일제치하 속에서 동산의 문을 열어주신 동산 설립자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셨지만, 동산은 내 운명을 만들어 주었다. 동산은, 그래서 내 영원한 어머니 학교이다.

 

 

 

[동산문화]제18호 발췌 - 2008.03.03

 

 

[동산문화]제4호 발췌 - 2000.08.01

 

[동산 80년사] 발췌

 

성명 박철기

직업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회수 62회

졸업연도 2013년

남기는 글

[동산문화] 27호 발췌- 2013.02.28

 

 

 

 

성명 정기익

직업 대한항공 수석 기장

졸업회수 23회

졸업연도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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