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한양대 기계공학과
연수구의회 4,5,6,7대 연수구 의원
성명 전덕생
직업 부천시 의회 의원
졸업회수 25회
졸업연도 1976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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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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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
국민의 힘 |
약력 |
부천남초등학교 총동문회 사무국장 |
성명 모강인
직업 해양경찰청 총장(치안총감)
졸업회수 24회
졸업연도 1975년
•경찰간부후보생 제32기 수석졸업, 대통령상 수상
•경찰청 정보2,3,5과장(총경)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경무관)
•울산경찰청 차장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
•청와대 치안비서관(치안감)
•인천경찰청장
•해양경찰청장(치안총감)
•녹조근정훈장 포상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행정·관계 부문(2008)
[경인일보] 인천경찰청장에 모강인 치안감… - 2009.03.11
내 인생의 애창곡, 교가(校歌)
전 해양경찰청장 모강인(24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누군가에 의해 불리는 이름, 자주 듣거나 부르는 노래 제목과 가사, 삶이 힘들고 팍팍할 때마다 꺼내 읽는 명언들. 그런 이름과 노랫말, 그리고 짤막한 명언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 한 마디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어(詩語)처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일지라도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신(神)의 손’이라고 불리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벤 카슨 박사가 그렇게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늘 해준 말씀 덕분이었다. 세계 최초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한 그는 어린 시절에 못 말리는 문제아였다.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나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늘 싸움만 일삼던 그에게 어머니는 주문(呪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벤, 넌 할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단다.”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도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우아한 거짓말〉에서 어린 시절 “잘 지내냐”는 이모의 한마디가 생(生)을 놓아 버리려는 자신을 지켜준 마지막 끈이었다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말이 주는 힘, 특히 반복해서 들리는 단어가 주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미국 예일대학 심리학과 존 바그 교수에 의하면 “우리 뇌(腦)는 ‘움직인다’는 단어를 읽으면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특정 단어가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단 말뿐이랴. 노래도 그렇다. 몇 년 전 아는 분의 부친 팔순 잔치에 초청된 가수 김민교는 그의 출세작(出世作)인 〈마지막 승부〉(1994년 손지창과 장동건, 심은하가 열연한 MBC 드라마의 주제곡이다.)가 제목 그대로 마지막 히트곡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1975년에 송대관이 발표한 노래 〈쨍하고 해 뜰 날〉은 18년간 무명 생활을 면치 못했던 그를 일약 최고의 대중가수(大衆歌手) 중 한 명으로 만들어냈다. 가사 그대로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이 돌아온’ 것이다. 내가 6년의 동산중·고등학교(東山中·高等學校)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바로 교가(校歌)다. 6년간 몇 번이나 불렀을까? 학교 행사 때면 물론이고, 야구 경기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운동장에 울려 퍼지던 교가. 졸업 후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고 동문(同門)들만 만났다 하면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동산인의 애창곡, 교가.
소성 옛터에 자리를 잡고 늠름하게 자라온 학덕(學德)의 동산 스승은 빛이 되어 우리 힘 되니 아~ 우리들은 겨레의 횃불이 되자 (후렴) 우렁찬 파도 소리 바위를 뚫네 신의(信義)에 뭉쳐라 동산학원
황해의 만경창파 가슴에 안고 하늘에도 오르련다 우리의 기상(氣像) 이어받은 우리 문화 길이 빛나며 아~ 우리들은 이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자
여명의 밀물처럼 넘치는 서기(瑞氣) 구원(久遠)한 동산의 맥박이 되자 찬란한 전통이 빛나고 빛나니 아~ 우리들은 누리의 샛별이 되자
동산 교가를 부르노라면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른다. 두 발은 대지를 갈라놓을 것처럼, 두 눈은 저 멀리 서해 바다를 삼켜버릴 것처럼, 우리의 가슴에 용맹한 기상이 넘친다. 동산의 교가는 구절구절이 우리의 도전 정신을 북돋운다. 그래서 동산인(東山人)들에게 교가는 배움을 함께 한 동문의식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의 힘을 북돋우는 응원가로, 승리의 축가로, 패배의 쓰라림을 달래주는 아리아로 기능한다. 나는 대학 입시에 2년 연속 실패한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학(進學)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인천, 부천 지대의 공장을 전전했다. 그 깜깜한 터널 속에서도 내가 끝까지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 머릿속 깊이 각인된 교가 때문이 아니었을까, 교가에 어려 있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입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동산을 갓 졸업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좌절의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아무리 해도 씻기지 않는 패배의식이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이 미래를 꿈꾸며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독재타도(獨裁打倒)를 외치며 최루탄에 맞서 피울음을 토할 때, 나는 페인트 분말이 뿌옇게 시야를 흐려놓는 악기 공장 한 구석에서 ‘오늘 야근은 또 어떻게 견뎌내나’ 하는 걱정에 젖을 뿐이었다. 밤늦은 퇴근길 동료들과 기울이는 술잔 속 대화도 그저 돈 버는 얘기, 옆 작업반 아가씨들 얘기, 아니면 쉬는 날 놀러 갈 얘기뿐이었다. 삶의 목표니, 미래니, 청사진이니 하는 낱말은 나의 사전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사어(死語)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내 의식 어디에 송곳 같은 탈출의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일까? 잊혀졌다고 여겼던 중·고등학교 시절 스승님들의 가르침들이 스멀스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돈이나 출세(出世)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겸손함이다, 항상 배우는 자세를 잃지 말아라,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 네 삶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귀히 여기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일 수 있다. 그러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마치 거울을 보듯 선연히 떠올라 자포자기와 술에 절어가는 나의 자의식(自意識)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과 약속했던 ‘판사(判事)가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목표로 삼고 사법시험 준비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실패와 시행착오의 세월이 1년, 2년, 3년… 그렇게 흘렀다. 시험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현실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81년 경찰공무원(순경) 시험에 응시하였고 그해 3월 나는 인천중부경찰서에서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2년 후, 나는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에 또 다시 합격해서 수석(首席)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위로 임용되어 서울 용산경찰서로 발령을 받았다. 젊은 시절의 오랜 방황 끝에 나는 마침내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자신감(自信感)을 회복하였다. 당시 나는 스승님들의 가르침 그대로, ‘하루 한 권의 책(冊)을 읽는다’는 각오로 독서에 매진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내가 맡은 공직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항상 다짐했다. 그것이 곧 국가에 충성(忠誠)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奉仕)하는 길임을 나는 한시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1985년 용산 갈월동 파출소장 때는 연말에 터진 강도사건으로 무려 54일간을,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20여 일간을, 1990년 명지대생 고(故) 강경대 군(君) 사건 때는 장장 45일간을 집에 가지 못하고 새벽에 잠깐 쪽잠을 자며 사무실에서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1995년 전국 대학가의 시위상황을 총괄하는 실무계장 직책을 받았을 때는 3년 6개월 동안 휴가는커녕 단 하루의 온전한 휴식을 취해보지 못해, 지금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야말로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나오는 말처럼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해 온’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공직으로 주어졌던 경찰의 최고위직 치안총감(治安總監), 해양경찰청장(海洋警察廳長) 직위는 내게는 영광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경찰공무원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더 큰 명령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경찰공무원으로서 32년간 봉직했다. 나 나름대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봉사하는 공직의 엄중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교가의 한 구절처럼 ‘겨레의 횃불’이 되고,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고, ‘누리의 샛별’이 되자는 각오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 공직을 관통해온 동산 교가의 가르침 때문이었으리라. 나에겐 상아탑에서의 정상적인 학습이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맺어지는 인맥(人脈)의 덕도 없었다. 오로지 6년간의 동산중·고등학교 시절이 나의 성격, 가치관, 역량을 형성해준 유일한 정규교육이었다. ‘신의’라는 교훈과 ‘책임감과 성실’이 최고의 가치임을 가르쳐 준 스승님들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야구장 스탠드 위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동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힘차게 불러 외치던 그 교가(校歌)가 없었더라면, 과연 내가 인생의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교가는 누가 뭐래도 나의 인생 최고의 애창곡(愛唱曲)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동산중·고등학교가 대건, 박문 등 사학(私學)들이 변화를 좇아 신개발지로 이전한 가운데서도, 1941년 현 교사(校舍)에 자리 잡은 이래 소성 옛터를 굳건히 지켜 오늘날 인천시 동구 관내에 있는 유일한 일반계 고등학교로 남아있는 것도, 그리고 우리 동산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은 작고 미미한 듯해도 동문들 간에 질시나 비방, 음해가 없이 신의(信義)로 하나가 되고, 뭉치면 그 힘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도 틈만 나면 두 손 불끈 쥐고 흔들며 외쳐대던 교가의 후렴 ‘우렁찬 파도 소리 바위를 뚫네, 신의에 뭉쳐라 동산학원’에 영향 받았음이 분명하다. 동산은 인천에서 개교한 사립학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산은 일제(日帝) 강점기 말, 민족의 선각자들이 힘을 모아 세운 ‘민족사학(民族私學)’이다. 그리고 언제나 제자들의 삶의 지표(指標)가 되고 인생의 빛이 되어주신 수많은 스승님들이 동산에는 있다. 그러기에 우리 동산은 ‘구원(久遠)’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영원히 무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나는 작곡가이자 교육자이셨던 고(故) 이흥렬(李興烈) 선생님(〈봄이 오면〉〈섬집 아기〉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군가 〈진짜 사나이〉도 만드셨다.)이 작곡하시고, 1950년대 피폐한 인천 사회에 청룡기 3회 우승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 인천 시민의 자존심을 세워주신 고(故) 남상협 교장 선생님이 작사하신 우리의 교가를 되뇌어본다. 언젠가는 후배들 앞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아코디언으로 그 힘차고 가슴 벅찬 노래를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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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8.29 선배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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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모강인 전 해양경찰청장 모교 진로특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