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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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모강인

직업 해양경찰청 총장(치안총감)

졸업회수 24회

졸업연도 1975년

주요경력

•경찰간부후보생 제32기 수석졸업, 대통령상 수상

•경찰청 정보2,3,5과장(총경)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경무관)

•울산경찰청 차장

•서울경찰청 정보관리부장

•청와대 치안비서관(치안감)

•인천경찰청장

•해양경찰청장(치안총감)

•녹조근정훈장 포상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행정·관계 부문(2008)

남기는 글

[머니투데이] 모강인 해경청장-'폭풍 몰아쳐도 국민 부르면 달려가'- 2011.09.16

[한국디지털뉴스] 모강인 11대 해경청장 취임, 5대정책 강조 - 2010.09.09

 

[경인일보] 인천경찰청장에 모강인 치안감… - 2009.03.11

 

[나 무 위 키]

 

 

내 인생의 애창곡, 교가(校歌)

 

전 해양경찰청장 모강인(24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누군가에 의해 불리는 이름, 자주 듣거나 부르는 노래 제목과 가사, 삶이 힘들고 팍팍할 때마다 꺼내 읽는 명언들. 그런 이름과 노랫말, 그리고 짤막한 명언이 주는 힘은 강력하다. 한 마디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어(詩語)처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일지라도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신(神)의 손’이라고 불리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벤 카슨 박사가 그렇게 유능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늘 해준 말씀 덕분이었다. 세계 최초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한 그는 어린 시절에 못 말리는 문제아였다.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나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늘 싸움만 일삼던 그에게 어머니는 주문(呪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벤, 넌 할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단다.”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도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우아한 거짓말〉에서 어린 시절 “잘 지내냐”는 이모의 한마디가 생(生)을 놓아 버리려는 자신을 지켜준 마지막 끈이었다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말이 주는 힘, 특히 반복해서 들리는 단어가 주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미국 예일대학 심리학과 존 바그 교수에 의하면 “우리 뇌(腦)는 ‘움직인다’는 단어를 읽으면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특정 단어가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단 말뿐이랴. 노래도 그렇다. 몇 년 전 아는 분의 부친 팔순 잔치에 초청된 가수 김민교는 그의 출세작(出世作)인 〈마지막 승부〉(1994년 손지창과 장동건, 심은하가 열연한 MBC 드라마의 주제곡이다.)가 제목 그대로 마지막 히트곡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1975년에 송대관이 발표한 노래 〈쨍하고 해 뜰 날〉은 18년간 무명 생활을 면치 못했던 그를 일약 최고의 대중가수(大衆歌手) 중 한 명으로 만들어냈다. 가사 그대로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이 돌아온’ 것이다.

  내가 6년의 동산중·고등학교(東山中·高等學校)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바로 교가(校歌)다. 6년간 몇 번이나 불렀을까? 학교 행사 때면 물론이고, 야구 경기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운동장에 울려 퍼지던 교가. 졸업 후 40년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고 동문(同門)들만 만났다 하면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동산인의 애창곡, 교가.

 

  소성 옛터에 자리를 잡고 늠름하게 자라온 학덕(學德)의 동산

  스승은 빛이 되어 우리 힘 되니 아~ 우리들은 겨레의 횃불이 되자

  (후렴) 우렁찬 파도 소리 바위를 뚫네 신의(信義)에 뭉쳐라 동산학원

 

  황해의 만경창파 가슴에 안고 하늘에도 오르련다 우리의 기상(氣像)

  이어받은 우리 문화 길이 빛나며 아~ 우리들은 이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자

 

  여명의 밀물처럼 넘치는 서기(瑞氣) 구원(久遠)한 동산의 맥박이 되자

  찬란한 전통이 빛나고 빛나니 아~ 우리들은 누리의 샛별이 되자

 

  동산 교가를 부르노라면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른다. 두 발은 대지를 갈라놓을 것처럼, 두 눈은 저 멀리 서해 바다를 삼켜버릴 것처럼, 우리의 가슴에 용맹한 기상이 넘친다. 동산의 교가는 구절구절이 우리의 도전 정신을 북돋운다. 그래서 동산인(東山人)들에게 교가는 배움을 함께 한 동문의식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의 힘을 북돋우는 응원가로, 승리의 축가로, 패배의 쓰라림을 달래주는 아리아로 기능한다.

  나는 대학 입시에 2년 연속 실패한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학(進學)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인천, 부천 지대의 공장을 전전했다. 그 깜깜한 터널 속에서도 내가 끝까지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 머릿속 깊이 각인된 교가 때문이 아니었을까, 교가에 어려 있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입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동산을 갓 졸업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좌절의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아무리 해도 씻기지 않는 패배의식이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이 미래를 꿈꾸며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독재타도(獨裁打倒)를 외치며 최루탄에 맞서 피울음을 토할 때, 나는 페인트 분말이 뿌옇게 시야를 흐려놓는 악기 공장 한 구석에서 ‘오늘 야근은 또 어떻게 견뎌내나’ 하는 걱정에 젖을 뿐이었다. 밤늦은 퇴근길 동료들과 기울이는 술잔 속 대화도 그저 돈 버는 얘기, 옆 작업반 아가씨들 얘기, 아니면 쉬는 날 놀러 갈 얘기뿐이었다. 삶의 목표니, 미래니, 청사진이니 하는 낱말은 나의 사전에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사어(死語)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내 의식 어디에 송곳 같은 탈출의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일까? 잊혀졌다고 여겼던 중·고등학교 시절 스승님들의 가르침들이 스멀스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돈이나 출세(出世)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겸손함이다, 항상 배우는 자세를 잃지 말아라,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 네 삶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귀히 여기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일 수 있다. 그러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마치 거울을 보듯 선연히 떠올라 자포자기와 술에 절어가는 나의 자의식(自意識)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과 약속했던 ‘판사(判事)가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목표로 삼고 사법시험 준비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실패와 시행착오의 세월이 1년, 2년, 3년… 그렇게 흘렀다. 시험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현실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81년 경찰공무원(순경) 시험에 응시하였고 그해 3월 나는 인천중부경찰서에서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2년 후, 나는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에 또 다시 합격해서 수석(首席)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위로 임용되어 서울 용산경찰서로 발령을 받았다.

  젊은 시절의 오랜 방황 끝에 나는 마침내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자신감(自信感)을 회복하였다. 당시 나는 스승님들의 가르침 그대로, ‘하루 한 권의 책(冊)을 읽는다’는 각오로 독서에 매진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내가 맡은 공직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항상 다짐했다. 그것이 곧 국가에 충성(忠誠)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奉仕)하는 길임을 나는 한시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1985년 용산 갈월동 파출소장 때는 연말에 터진 강도사건으로 무려 54일간을,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20여 일간을, 1990년 명지대생 고(故) 강경대 군(君) 사건 때는 장장 45일간을 집에 가지 못하고 새벽에 잠깐 쪽잠을 자며 사무실에서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1995년 전국 대학가의 시위상황을 총괄하는 실무계장 직책을 받았을 때는 3년 6개월 동안 휴가는커녕 단 하루의 온전한 휴식을 취해보지 못해, 지금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야말로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나오는 말처럼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해 온’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공직으로 주어졌던 경찰의 최고위직 치안총감(治安總監), 해양경찰청장(海洋警察廳長) 직위는 내게는 영광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경찰공무원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더 큰 명령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경찰공무원으로서 32년간 봉직했다. 나 나름대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봉사하는 공직의 엄중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교가의 한 구절처럼 ‘겨레의 횃불’이 되고,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고, ‘누리의 샛별’이 되자는 각오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 공직을 관통해온 동산 교가의 가르침 때문이었으리라.

  나에겐 상아탑에서의 정상적인 학습이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맺어지는 인맥(人脈)의 덕도 없었다. 오로지 6년간의 동산중·고등학교 시절이 나의 성격, 가치관, 역량을 형성해준 유일한 정규교육이었다. ‘신의’라는 교훈과 ‘책임감과 성실’이 최고의 가치임을 가르쳐 준 스승님들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야구장 스탠드 위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동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힘차게 불러 외치던 그 교가(校歌)가 없었더라면, 과연 내가 인생의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교가는 누가 뭐래도 나의 인생 최고의 애창곡(愛唱曲)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동산중·고등학교가 대건, 박문 등 사학(私學)들이 변화를 좇아 신개발지로 이전한 가운데서도, 1941년 현 교사(校舍)에 자리 잡은 이래 소성 옛터를 굳건히 지켜 오늘날 인천시 동구 관내에 있는 유일한 일반계 고등학교로 남아있는 것도, 그리고 우리 동산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은 작고 미미한 듯해도 동문들 간에 질시나 비방, 음해가 없이 신의(信義)로 하나가 되고, 뭉치면 그 힘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도 틈만 나면 두 손 불끈 쥐고 흔들며 외쳐대던 교가의 후렴 ‘우렁찬 파도 소리 바위를 뚫네, 신의에 뭉쳐라 동산학원’에 영향 받았음이 분명하다.

  동산은 인천에서 개교한 사립학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동산은 일제(日帝) 강점기 말, 민족의 선각자들이 힘을 모아 세운 ‘민족사학(民族私學)’이다. 그리고 언제나 제자들의 삶의 지표(指標)가 되고 인생의 빛이 되어주신 수많은 스승님들이 동산에는 있다. 그러기에 우리 동산은 ‘구원(久遠)’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영원히 무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나는 작곡가이자 교육자이셨던 고(故) 이흥렬(李興烈) 선생님(〈봄이 오면〉〈섬집 아기〉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군가 〈진짜 사나이〉도 만드셨다.)이 작곡하시고, 1950년대 피폐한 인천 사회에 청룡기 3회 우승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 인천 시민의 자존심을 세워주신 고(故) 남상협 교장 선생님이 작사하신 우리의 교가를 되뇌어본다. 언젠가는 후배들 앞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아코디언으로 그 힘차고 가슴 벅찬 노래를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 2009.08.29 선배와의 만남>

 

 

 

<2017.05.16 모강인 전 해양경찰청장 모교 진로특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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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용호

직업 16대 국회의원

졸업회수 15회

졸업연도 1966년

주요경력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KBS 아나운서 실장

•한국아나운서협회 회장

•제16대 국회의원(인천 서구 강화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

•한국건설CALS협회 상근부회장

•553돌 한글날 대통령표창

•동산중·고등학교 총동문회 고문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언론·사회 부문(1999)

남기는 글

[스포츠월드] ‘마이웨이’ 박용호 전 아나운서 근황 공개…“방송에 대한 그리움 있다” - 2020.05.23

[중앙일보] ‘6시 내고향’ 7000회 장수 비결? “신라면처럼 시대 맞춰 변화” - 2020.03.30

[나 무 위 키]

 

 

〈6시 내 고향〉의 산실, 동산

 

전 국회의원 박용호(15회)

 

  많은 분들이 나를 보면 KBS의 장수프로 〈6시 내 고향〉을 이야기한다. 내가 그 프로의 사회자로서 활동했던 것이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시의 내 활동이 여러분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보면 KBS 아나운서로 시청자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이 내겐 삶의 전성시대였다. 그렇게 아나운서로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동산 방송반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즐겁게 고백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창시절이 있었지만,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절은 고등학교 시절이 아니던가. 내 인생 거의가 東山이라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니리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분단된 국토의 서북쪽 강화, 읍내에서도 서북쪽으로 16㎞나 떨어진 북한과 경계를 이룬 내가면 황청포구였다. 이엉으로 엮은 초가 분교장에서 4학년까지, 5~6학년은 면소재지인 내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소재지 강화중학교를 다녔다. 난 이 조그만 섬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밖의 넓은 세상을 동경했던 사춘기 시절이었나 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강화 최북단 교동도를 격일간으로 운항하는 통운호 갑판 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도 한번 저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자, 대처로 말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같은 고등학교 진학을 강요하시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인천行 연락선에 몸을 실은 건 내겐 참으로 큰 용기였었다. 그리고 마주한 東山 학원! 난 동산고등학교를 대하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강화도 섬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넓은 운동장에 야구장까지, 최신식 강당, 꿈의 저택 같았던 교사,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의 환희가 이러했을까. 지금도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다.

  나는 동산에서 소년의 푸른 꿈을 키워나갔다. 1963년 5월 고1학년 때, 내 일생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있었다. 학교 방송반에서 흘러나오는 멋진 아나운서 멘트, 방송반에서 학생 아나운서를 뽑는다는 공지 멘트였다. 아직은 촌티가 가시지 않았고 학교생활도 서투른 내가 용기를 내어 방송반을 찾았다. 국어책을 읽어보라는 방송반 선배들의 시험. 그 시험에서의 합격. 그로부터 난 아나운서가 되어 학교에만 가면 거의 방송반에서 살았다. 본관 붉은 벽돌의 서무실 옆이 방송반이었다.

  “東山 학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동산중⋅고등학교 방송반입니다. 이태리 기상곡과 함께 지금부터 동산중⋅고등학교 아침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나의 목소리. 그리고는 채근담의 명상록을 낭독하였다. 아침·점심·저녁 방송, 그때 고3 선배들은 방송을 아주 잘했다. 야구 중계도 그 선배들에게 배웠다. 라이벌 인천고등학교와 야구 경기 때면 전교생이 총출동했고, 우린 유선 방송으로 야구를 흥미진진하게 중계방송했다. 선배들은 벌써 그때 학생 신분으로 HCKX 복음방송에 출연해 전파를 탈 정도의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본 송산(松山)고등학교에서 전문(電文)이 왔다. 한국 고교생들의 학교생활을 녹음 방송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전 일본 고교방송 콩쿠르에 출품하겠다는 것이었다. 난 서투른 녹음기 조작을 여러 날 연습하면서 우리 학교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프로를 만들어, 말씀 잘하시기로 유명한 남상협 교장선생님의 음성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 얼마 후 전 일본 고교방송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았다.

  그때부터 난 장래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아나운서의 꿈에 매달렸다. 그 시절, 대학에 신문방송학과가 신설됐는데 신방과를 가야만 아나운서가 되는 줄 알고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지망했다. 그러나 워낙 신설 인기 학과가 돼서 경쟁률이 상상을 초월했다. 17대1을 다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신방과 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 끝에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재능을 꽃 피도록 도와주신 시인이며 교수이신 김용호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교수님의 지도 아래 나는 단국대학교 방송반의 아나운서로 뽑혀 보람찬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VUNC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에 발탁되어 ‘대학의 소리’에서 진행하는 팝송 프로 ‘한밤의 전화’ 프로그램을 3년간이나 진행한 일이다. 당시 그 프로그램은 팬레터가 쌓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 후 KBS 아나운서실에서 여름학교 대학방송요원 연수가 있었다. 서울시 12개 대학에서 2명씩 선발되어 24명이 연수를 하게 되었다. 남산에 위치한 KBS 2층 아나운서실, 선풍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한여름이라 별 효과가 없었다. 아나운서실에는 30여 명의 KBS 아나운서들이 있었는데 대학 연수생까지 합해 5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꽉 찼으니,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우리 학생들은 말 그대로 미운 오리 새끼들 이었다. 그러니 눈치가 빠른 대학생들은 한두 명씩 연수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버티었다. 연수가 끝날 무렵 남은 연수생은 오직 나뿐이었다.

  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겨울방학까지 3년간 내리 KBS 방송국에서 아나운서 연수를 했다. 강한 집념으로 끈질기게 출석하니까, 어느 날 당시 아나운서 실장이셨던 이광재 실장이 “어이, 학생, 뉴스 원고 한번 낭독해 봐.” 하신다. 순간 나는 가슴이 콩알만 해진 심정으로 뉴스 아닌 책을 읽듯 했는데, 실장 말씀이 “소질이 있군. 잘하면 아나운서가 되겠는데.” 하고 격려해 주셨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대학 4학년 봄, KBS 아나운서 공채를 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 시험에서 이미 준비된(?) 나는 아나운서 공채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된다. 1969년 3월이었다. 두 달간 연수 기간을 거쳐 그해 5월 20일 전라북도 전주방송국 아나운서로 발령을 받으면서 꿈에 그리던 KBS 아나운서가 되었다. 1970년 4월 나는 서울중앙방송국으로 발령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지역엔 서울 근무를 오매불망 그리는 아나운서들이 많았는데 3, 4년이 지나도 서울행을 할 수 있는 아나운서가 몇 명 되질 않았다. 아나운서 공채 합격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것이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그 후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부산 방송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그 부산 방송시절 7개월 만에 나는 다시 서울 발령의 행운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인생사 인기의 터널은 쉽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 ‘오후의 교차로’ 12년 진행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언제나 젊음’, ‘건강하게 삽시다’ 등 많은 프로그램을 담당했지만 아직은 무명시절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드디어 1991년 5월 20일 지방 신시대를 열면서 태동한 〈6시 내 고향〉의 MC를 맡으면서 나는 내 방송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서게 된다. 매일 방송하기를 장장 9년 반을 MC로 활약하였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현장방송을 하는 〈6시 내 고향〉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국민의 방송이 되었다. 그 방송을 하는 동안 나는 KBS 아나운서 실장을 지냈고, 방송의 날에 ‘아나운서 부문 방송대상’을 수상했고, 대통령상도 두 번이나 수상하는 등 19번의 상을 받는 축복을 받았다. 정말로 그때가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던 1999년 10월 하순, 집권당의 김대중 대통령 특보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께서 새로운 당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시는데 나더러 창당추진 홍보위원장이 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나운서를 천직으로 알고 있던 터라 정치에 입문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휴가도 휴일도 없이 9년 반을 지켜왔던 〈6시 내 고향〉을 그만두고 방송을 떠난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사했다. 그러나 끈질긴 권유에 한 달간을 밤잠을 못 이루고 고심하던 끝에, 나는 천직이던 아나운서를 사직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 나라의 방송문화 정책에 헌신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이끈 것이리라.

  정치에 전혀 문외한인 내가 선거전에 뛰어들고는 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정치가 그렇게 험한 곳인 줄 알았으면 절대 사양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냥 운명에 맡기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16대 국회의원 선거 중반, 어느 일간지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현역인 ㅇ의원과 나는 48:24 더블 수치로 지고 있었다. 그만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중앙당에서 성화가 대단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갔다. 그리고 2000년 4월 13일 동산 선후배들의 불같은 성원과 고향 주민들의 지지로 나는 기적과 같은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제16대 서강화을(강화 검단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의원 시절 나는 원내부총무, 농어민 특별위원장, 인천항 발전특별위원 등 초선의원치고는 꽤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강화 남단 초지 대교 건설과 같은 굵직한 사업도 따내면서 보람 있는 의정 생활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의정 활동의 행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정치가 주는 고통의 쓴맛을 오랫동안 맛보아야 했다. 언젠간 그 아픔의 세월을 정리할 날이 올 것이다. 다만 나를 밀어준 고향분들, 그리고 동산의 선후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릴 뿐이다.

  〈6시 내 고향〉 고별 방송을 보면서, 어느 어르신께서 전화로 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박 아나운서,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가 가는 법이 아냐.” 그러나 당시엔 백로가 까마귀 싸움을 말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 되어 정치계에서 실패한 나 자신이 되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있기에 세상을 더욱 깊이 성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도 얻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내 아들이 KBS 아나운서가 되어 아비 뒤를 이어주는 것이 흐뭇하다.

  나는 지금 향리 강화에 초옥을 짓고 고향의 내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만 소망하기는 푸르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영역에서 기꺼이 재능 봉사를 하며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동산문화] 제4호 발췌 - 2000.08.01

졸업생 이미지

성명 이익진

직업 계양구청장

졸업회수 9회

졸업연도 1960년

주요경력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수료

•대한건설협회인천지회사무처장

•생활체육회 계양구협의회장

•법무부 범죄예방위원 인천계양구 지회장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인천광역시 부위원장

•제2대 인천광역시 시의원

•인천시의회 건설위원회, 예결산위원회 위원장

•인천광역시 계양구청장 (2006-2010)

•대한민국 근정포장(1983)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행정·관계 부문(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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