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성명 김홍탁
직업 작곡가
졸업회수 11회
졸업연도 1962년
서울재즈아카데미 원장
성명 임동순
직업 농협중앙회 인천지역본부장
졸업회수 32회
졸업연도 1983년
서울대학교 졸업
성명 황우겸 (동산중-6년제)
직업 KBS-TV 방송국 아나운서실장
졸업회수 2회
졸업연도 1950년
•1945년 동산 야구부 창단 멤버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원 경영학과 수료
•KBS-TV 방송국 아나운서실장
•(주)KAL 대한항공 상임이사
•한국청년회의소(JC) 중앙회장
•동아제약 그룹 문화재단 감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대한야구협회 고문
•KAL 대한항공 OB클럽 고문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사회·문화 부문(2004)
[한국경제] 황우겸 초대아나운서클럽 회장 별세 - 2023.07.31
[뉴스엔] 황우겸 고문 ‘아나운서대상 시상식 특별공로상 수상’ - 2017.12.15
[문화뉴스] 호국 보훈의 달, '군인 선수'들에게 박수를! - 2017.06.25
[조선일보] 청룡기 70년, 내 야구 人生도 70년 - 2015.11.07
본교 야구부를 빛내고 학교의 위상을 드높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초창기 야구부원 - 1945.09
* 저서「바보상자」,「실록과 JC론」,「큰 지도자․작은 지도자」,「지도자와 단체 경영」
구순에 돌아보는 동산의 추억
“이야데스(싫다)” “소년전차대를 지원할 수 있는가?”라는 일본인 교장의 질문에 대한 황우겸의 답변이었다. 교장, 교감, 교원이 군인과 다름없는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에워싼 살기등등한 한복판에서 열두 살 황우겸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니 소름끼치는 일이다. 울분 속에서 깨어나고 울분 속에서 잠들었던 일제시대, 국운은 정교하게 파괴되고 민족정기는 마비되었고, 겨레가 자유롭게 설 땅은 없었다. 이 땅 어린 소년들에게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충성을 요구했는데 그 때 앞장섰던 조직이 소년전차대였다. 소년전차대의 포기는 곧바로 인상(인천고등학교 전신)의 불합격으로 이어졌다. 민족학교라며 실낱같은 끈을 잡고 있는 열악한 환경의 동산으로 황우겸은 진로를 바꾸게 된다. 이것이 곧 황우겸의 인생사를 꿰는 고난의 첫 단추였다. 동산은 변두리의 척박하고 보잘 것 없는 교정과 적은 수의 학생으로 한 점의 전통조차 만들기가 힘겨웠다. 젊은 날 교편을 잡은 김세환, 이달성, 박현덕은 아예 학교 안 사택에서 둥지를 틀고 주야로 건각을 채찍질했다. 각종 경기와 행사에서 우승하는 것이 곧 강한 동산으로 탈바꿈하는 일이었다. 힘깨나 쓰는 황우겸을 비롯하여 윤태석, 김재덕, 임배영, 장경순 등은 각종 운동 경기마다 전사로 차출되었다. 몸을 던지지 않는다면 기적이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맨몸이 갑옷인 채로 출정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때마침 시대와 함께 동행한 야구는 이 야수들에게는 단비였다. 신예 동산에서 야구는 하나의 종교였으니 황혼에서 어스름, 어둠에 휘감겨 눈앞에서 공이 사라질 때까지 연마의 나날은 거듭되었다. 이는 장차 청룡기 3년 우승을 이루는 발판이 된다. 질풍은 달콤한 벗이었고 노도는 차라리 연인이었다. 안온한 휴식의 삶보다는 질펀하고 살벌한 현장을 더 즐겼다. 황우겸은 젖을 먹던 힘까지 괴력으로 바꿔서 차례차례 장애물과 싸워 나갔다. 맨 몸으로 우승을 일구고 기세등등하게 학교 명예를 물어들이니 동산은 서서히 강한 건학의 틀을 갖추게 된다. 일제 말기의 만행, 광복이후 좌우의 극한 대립, 6.25 동란에도 등고선을 이루며 소년 유도부 우승, 동산야구 창립멤버, 전 인천 학도대대장을 거쳤으며 어느덧 청년 황우겸은 인천 출신으로는 최초로 KBS 아나운서가 된다. 아나운서 또한 그날그날의 삶과 싸우는 실시간 현장이 아닌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오른 정권은 방송이 언로의 일번지였으니 서슬이 퍼렇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권력 앞으로 두 무릎을 조아릴 때 “인기만 마시고는 못 산다” 라면서 오늘에 와서도 실천되기 어려운 “방송 중립화”라는 성명서를 내고 거사를 주동한다. 쌓아온 명예를 송두리째 건 일대 도박이었다. “황우겸은 여러 사람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양복 한 벌 맞추어 줘라.” 당시 절대 권력의 한쪽 날개였던 최치환 공보실장은 벌을 상으로 바꾼다. 시대는 흉흉했으나 사나이들에겐 법도 뛰어 넘는 놀라운 낭만이 있었다. 그 역시 다행이었다. 1961년 KBS 아나운서 실장이 되었을 때 KBS TV는 개국이 되어 겨레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황우겸은 “스타 탄생”이라는 공개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이끈다. 결코 시류에 휩쓸리는 일이 없고 실시간 현장에서도 주전이기를 고집했다. 이것이 세상에서 백배 더 멋지게 사는 삶이었다. 그러한 그가 파란만장했던 인생여정을 훌쩍 넘겨 구순나이에 도착하니 다 못한 미련도 남고 뒤늦은 회환도 있으련만, 뜻 맞고, 허물없고, 낯이 살가운 동창들은 6.25동란 때 산화했거나 긴 여정 속에서 참 많이 사라져 갔다. 옛 일을 불러내어 헤아려 보니 아찔한 그림이 되어 자꾸 눈에 밟힌다. 청년, 장년의 무지개는 어느덧 씻겨갔고 문득 노년은 발걸음조차 무겁다. “참 힘든 시절이었지.” 삶의 고비고비를 이겨 낸 구순에 지르는 비명이었다. 왜 이 노신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숨죽이는가? 황우겸의 삶이 곧 동산의 80년사와 대등하게 맞닿아 있는 바로미터이며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왜 동산을 모교라고 부를까? 동산은 이제 막 솜털을 벗은 소년들이 청년으로 뼈와 살이 급하게 성장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망아지들이 건장한 시민으로 자라기까지 성장통을 겪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80년이라면 세상사 대립각에 긁혀 구슬은 빛이 탁해지고, 오탁과 홍진의 인간사에서 금강석도 켜켜이 때가 끼기 마련이건만 동산은 그때마다 새 물결, 새로운 젊음이 와서 전통 위에 새 전통이 곁들여져 길을 내면서 그 빛남은 끊임없다. 우람한 동산은 이 위풍당당한 노신사 황우겸의 젊음과 기개를 무기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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