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성명 정구운
직업 인천연수구청장
졸업회수 11회
졸업연도 1962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인천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한국기자협회 회장(25대~27대)
•국민일보 편집국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자문위원
•(주)드림산업 대표이사
•제3대 민선 인천연수구청장
•인천광역시 군수․구청장협의회 회장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정·관계 부문(2004)
성명 박용호
직업 16대 국회의원
졸업회수 15회
졸업연도 1966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KBS 아나운서 실장
•한국아나운서협회 회장
•제16대 국회의원(인천 서구 강화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
•한국건설CALS협회 상근부회장
•553돌 한글날 대통령표창
•동산중·고등학교 총동문회 고문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언론·사회 부문(1999)
[스포츠월드] ‘마이웨이’ 박용호 전 아나운서 근황 공개…“방송에 대한 그리움 있다” - 2020.05.23
[중앙일보] ‘6시 내고향’ 7000회 장수 비결? “신라면처럼 시대 맞춰 변화” - 2020.03.30
〈6시 내 고향〉의 산실, 동산
전 국회의원 박용호(15회)
많은 분들이 나를 보면 KBS의 장수프로 〈6시 내 고향〉을 이야기한다. 내가 그 프로의 사회자로서 활동했던 것이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시의 내 활동이 여러분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보면 KBS 아나운서로 시청자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이 내겐 삶의 전성시대였다. 그렇게 아나운서로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동산 방송반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즐겁게 고백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창시절이 있었지만,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절은 고등학교 시절이 아니던가. 내 인생 거의가 東山이라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니리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분단된 국토의 서북쪽 강화, 읍내에서도 서북쪽으로 16㎞나 떨어진 북한과 경계를 이룬 내가면 황청포구였다. 이엉으로 엮은 초가 분교장에서 4학년까지, 5~6학년은 면소재지인 내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소재지 강화중학교를 다녔다. 난 이 조그만 섬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밖의 넓은 세상을 동경했던 사춘기 시절이었나 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강화 최북단 교동도를 격일간으로 운항하는 통운호 갑판 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도 한번 저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자, 대처로 말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같은 고등학교 진학을 강요하시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인천行 연락선에 몸을 실은 건 내겐 참으로 큰 용기였었다. 그리고 마주한 東山 학원! 난 동산고등학교를 대하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강화도 섬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넓은 운동장에 야구장까지, 최신식 강당, 꿈의 저택 같았던 교사,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의 환희가 이러했을까. 지금도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다. 나는 동산에서 소년의 푸른 꿈을 키워나갔다. 1963년 5월 고1학년 때, 내 일생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있었다. 학교 방송반에서 흘러나오는 멋진 아나운서 멘트, 방송반에서 학생 아나운서를 뽑는다는 공지 멘트였다. 아직은 촌티가 가시지 않았고 학교생활도 서투른 내가 용기를 내어 방송반을 찾았다. 국어책을 읽어보라는 방송반 선배들의 시험. 그 시험에서의 합격. 그로부터 난 아나운서가 되어 학교에만 가면 거의 방송반에서 살았다. 본관 붉은 벽돌의 서무실 옆이 방송반이었다. “東山 학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동산중⋅고등학교 방송반입니다. 이태리 기상곡과 함께 지금부터 동산중⋅고등학교 아침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나의 목소리. 그리고는 채근담의 명상록을 낭독하였다. 아침·점심·저녁 방송, 그때 고3 선배들은 방송을 아주 잘했다. 야구 중계도 그 선배들에게 배웠다. 라이벌 인천고등학교와 야구 경기 때면 전교생이 총출동했고, 우린 유선 방송으로 야구를 흥미진진하게 중계방송했다. 선배들은 벌써 그때 학생 신분으로 HCKX 복음방송에 출연해 전파를 탈 정도의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본 송산(松山)고등학교에서 전문(電文)이 왔다. 한국 고교생들의 학교생활을 녹음 방송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전 일본 고교방송 콩쿠르에 출품하겠다는 것이었다. 난 서투른 녹음기 조작을 여러 날 연습하면서 우리 학교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프로를 만들어, 말씀 잘하시기로 유명한 남상협 교장선생님의 음성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 얼마 후 전 일본 고교방송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았다. 그때부터 난 장래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아나운서의 꿈에 매달렸다. 그 시절, 대학에 신문방송학과가 신설됐는데 신방과를 가야만 아나운서가 되는 줄 알고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지망했다. 그러나 워낙 신설 인기 학과가 돼서 경쟁률이 상상을 초월했다. 17대1을 다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신방과 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 끝에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재능을 꽃 피도록 도와주신 시인이며 교수이신 김용호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교수님의 지도 아래 나는 단국대학교 방송반의 아나운서로 뽑혀 보람찬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VUNC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에 발탁되어 ‘대학의 소리’에서 진행하는 팝송 프로 ‘한밤의 전화’ 프로그램을 3년간이나 진행한 일이다. 당시 그 프로그램은 팬레터가 쌓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 후 KBS 아나운서실에서 여름학교 대학방송요원 연수가 있었다. 서울시 12개 대학에서 2명씩 선발되어 24명이 연수를 하게 되었다. 남산에 위치한 KBS 2층 아나운서실, 선풍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한여름이라 별 효과가 없었다. 아나운서실에는 30여 명의 KBS 아나운서들이 있었는데 대학 연수생까지 합해 5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꽉 찼으니,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우리 학생들은 말 그대로 미운 오리 새끼들 이었다. 그러니 눈치가 빠른 대학생들은 한두 명씩 연수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버티었다. 연수가 끝날 무렵 남은 연수생은 오직 나뿐이었다. 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겨울방학까지 3년간 내리 KBS 방송국에서 아나운서 연수를 했다. 강한 집념으로 끈질기게 출석하니까, 어느 날 당시 아나운서 실장이셨던 이광재 실장이 “어이, 학생, 뉴스 원고 한번 낭독해 봐.” 하신다. 순간 나는 가슴이 콩알만 해진 심정으로 뉴스 아닌 책을 읽듯 했는데, 실장 말씀이 “소질이 있군. 잘하면 아나운서가 되겠는데.” 하고 격려해 주셨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대학 4학년 봄, KBS 아나운서 공채를 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 시험에서 이미 준비된(?) 나는 아나운서 공채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게 된다. 1969년 3월이었다. 두 달간 연수 기간을 거쳐 그해 5월 20일 전라북도 전주방송국 아나운서로 발령을 받으면서 꿈에 그리던 KBS 아나운서가 되었다. 1970년 4월 나는 서울중앙방송국으로 발령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지역엔 서울 근무를 오매불망 그리는 아나운서들이 많았는데 3, 4년이 지나도 서울행을 할 수 있는 아나운서가 몇 명 되질 않았다. 아나운서 공채 합격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것이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그 후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부산 방송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그 부산 방송시절 7개월 만에 나는 다시 서울 발령의 행운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인생사 인기의 터널은 쉽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 ‘오후의 교차로’ 12년 진행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언제나 젊음’, ‘건강하게 삽시다’ 등 많은 프로그램을 담당했지만 아직은 무명시절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드디어 1991년 5월 20일 지방 신시대를 열면서 태동한 〈6시 내 고향〉의 MC를 맡으면서 나는 내 방송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서게 된다. 매일 방송하기를 장장 9년 반을 MC로 활약하였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현장방송을 하는 〈6시 내 고향〉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국민의 방송이 되었다. 그 방송을 하는 동안 나는 KBS 아나운서 실장을 지냈고, 방송의 날에 ‘아나운서 부문 방송대상’을 수상했고, 대통령상도 두 번이나 수상하는 등 19번의 상을 받는 축복을 받았다. 정말로 그때가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던 1999년 10월 하순, 집권당의 김대중 대통령 특보단장이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께서 새로운 당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시는데 나더러 창당추진 홍보위원장이 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나운서를 천직으로 알고 있던 터라 정치에 입문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휴가도 휴일도 없이 9년 반을 지켜왔던 〈6시 내 고향〉을 그만두고 방송을 떠난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사했다. 그러나 끈질긴 권유에 한 달간을 밤잠을 못 이루고 고심하던 끝에, 나는 천직이던 아나운서를 사직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 나라의 방송문화 정책에 헌신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이끈 것이리라. 정치에 전혀 문외한인 내가 선거전에 뛰어들고는 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정치가 그렇게 험한 곳인 줄 알았으면 절대 사양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냥 운명에 맡기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16대 국회의원 선거 중반, 어느 일간지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현역인 ㅇ의원과 나는 48:24 더블 수치로 지고 있었다. 그만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중앙당에서 성화가 대단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갔다. 그리고 2000년 4월 13일 동산 선후배들의 불같은 성원과 고향 주민들의 지지로 나는 기적과 같은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제16대 서강화을(강화 검단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의원 시절 나는 원내부총무, 농어민 특별위원장, 인천항 발전특별위원 등 초선의원치고는 꽤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강화 남단 초지 대교 건설과 같은 굵직한 사업도 따내면서 보람 있는 의정 생활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의정 활동의 행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정치가 주는 고통의 쓴맛을 오랫동안 맛보아야 했다. 언젠간 그 아픔의 세월을 정리할 날이 올 것이다. 다만 나를 밀어준 고향분들, 그리고 동산의 선후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릴 뿐이다. 〈6시 내 고향〉 고별 방송을 보면서, 어느 어르신께서 전화로 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박 아나운서,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가 가는 법이 아냐.” 그러나 당시엔 백로가 까마귀 싸움을 말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 되어 정치계에서 실패한 나 자신이 되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있기에 세상을 더욱 깊이 성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도 얻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내 아들이 KBS 아나운서가 되어 아비 뒤를 이어주는 것이 흐뭇하다. 나는 지금 향리 강화에 초옥을 짓고 고향의 내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만 소망하기는 푸르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영역에서 기꺼이 재능 봉사를 하며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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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화] 제4호 발췌 - 2000.08.01
성명 김홍탁
직업 작곡가
졸업회수 11회
졸업연도 1962년
서울재즈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