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현황

1941~1950

졸업생 이미지

성명 황우겸 (동산중-6년제)

직업 KBS-TV 방송국 아나운서실장

졸업회수 2회

졸업연도 1950년

주요경력

•1945년 동산 야구부 창단 멤버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원 경영학과 수료

•KBS-TV 방송국 아나운서실장

•(주)KAL 대한항공 상임이사

•한국청년회의소(JC) 중앙회장

•동아제약 그룹 문화재단 감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대한야구협회 고문

•KAL 대한항공 OB클럽 고문

•'자랑스러운 동산인 상' 수상 -  사회·문화 부문(2004)

남기는 글

[한국경제] 황우겸 초대아나운서클럽 회장 별세 - 2023.07.31

[뉴스엔] 황우겸 고문 ‘아나운서대상 시상식 특별공로상 수상’ - 2017.12.15

[문화뉴스] 호국 보훈의 달, '군인 선수'들에게 박수를! - 2017.06.25

[조선일보] 청룡기 70년, 내 야구 人生도 70년 - 2015.11.07

본교 야구부를 빛내고 학교의 위상을 드높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초창기 야구부원 - 1945.09

* 저서「바보상자」,「실록과 JC론」,「큰 지도자․작은 지도자」,「지도자와 단체 경영」

 

 

 구순에 돌아보는 동산의 추억

 

   “이야데스(싫다)”

  “소년전차대를 지원할 수 있는가?”라는 일본인 교장의 질문에 대한 황우겸의 답변이었다.

  교장, 교감, 교원이 군인과 다름없는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에워싼 살기등등한 한복판에서 열두 살 황우겸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니 소름끼치는 일이다. 울분 속에서 깨어나고 울분 속에서 잠들었던 일제시대, 국운은 정교하게 파괴되고 민족정기는 마비되었고, 겨레가 자유롭게 설 땅은 없었다. 이 땅 어린 소년들에게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충성을 요구했는데 그 때 앞장섰던 조직이 소년전차대였다. 소년전차대의 포기는 곧바로 인상(인천고등학교 전신)의 불합격으로 이어졌다. 민족학교라며 실낱같은 끈을 잡고 있는 열악한 환경의 동산으로 황우겸은 진로를 바꾸게 된다. 이것이 곧 황우겸의 인생사를 꿰는 고난의 첫 단추였다.

  동산은 변두리의 척박하고 보잘 것 없는 교정과 적은 수의 학생으로 한 점의 전통조차 만들기가 힘겨웠다. 젊은 날 교편을 잡은 김세환, 이달성, 박현덕은 아예 학교 안 사택에서 둥지를 틀고 주야로 건각을 채찍질했다. 각종 경기와 행사에서 우승하는 것이 곧 강한 동산으로 탈바꿈하는 일이었다. 힘깨나 쓰는 황우겸을 비롯하여 윤태석, 김재덕, 임배영, 장경순 등은 각종 운동 경기마다 전사로 차출되었다. 몸을 던지지 않는다면 기적이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맨몸이 갑옷인 채로 출정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때마침 시대와 함께 동행한 야구는 이 야수들에게는 단비였다. 신예 동산에서 야구는 하나의 종교였으니 황혼에서 어스름, 어둠에 휘감겨 눈앞에서 공이 사라질 때까지 연마의 나날은 거듭되었다. 이는 장차 청룡기 3년 우승을 이루는 발판이 된다.

  질풍은 달콤한 벗이었고 노도는 차라리 연인이었다. 안온한 휴식의 삶보다는 질펀하고 살벌한 현장을 더 즐겼다. 황우겸은 젖을 먹던 힘까지 괴력으로 바꿔서 차례차례 장애물과 싸워 나갔다. 맨 몸으로 우승을 일구고 기세등등하게 학교 명예를 물어들이니 동산은 서서히 강한 건학의 틀을 갖추게 된다.

  일제 말기의 만행, 광복이후 좌우의 극한 대립, 6.25 동란에도 등고선을 이루며 소년 유도부 우승, 동산야구 창립멤버, 전 인천 학도대대장을 거쳤으며 어느덧 청년 황우겸은 인천 출신으로는 최초로 KBS 아나운서가 된다. 아나운서 또한 그날그날의 삶과 싸우는 실시간 현장이 아닌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오른 정권은 방송이 언로의 일번지였으니 서슬이 퍼렇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권력 앞으로 두 무릎을 조아릴 때 “인기만 마시고는 못 산다” 라면서 오늘에 와서도 실천되기 어려운 “방송 중립화”라는 성명서를 내고 거사를 주동한다. 쌓아온 명예를 송두리째 건 일대 도박이었다.

  “황우겸은 여러 사람 앞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양복 한 벌 맞추어 줘라.” 당시 절대 권력의 한쪽 날개였던 최치환 공보실장은 벌을 상으로 바꾼다. 시대는 흉흉했으나 사나이들에겐 법도 뛰어 넘는 놀라운 낭만이 있었다. 그 역시 다행이었다.

  1961년 KBS 아나운서 실장이 되었을 때 KBS TV는 개국이 되어 겨레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황우겸은 “스타 탄생”이라는 공개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이끈다. 결코 시류에 휩쓸리는 일이 없고 실시간 현장에서도 주전이기를 고집했다. 이것이 세상에서 백배 더 멋지게 사는 삶이었다. 그러한 그가 파란만장했던 인생여정을 훌쩍 넘겨 구순나이에 도착하니 다 못한 미련도 남고 뒤늦은 회환도 있으련만, 뜻 맞고, 허물없고, 낯이 살가운 동창들은 6.25동란 때 산화했거나 긴 여정 속에서 참 많이 사라져 갔다. 옛 일을 불러내어 헤아려 보니 아찔한 그림이 되어 자꾸 눈에 밟힌다.

  청년, 장년의 무지개는 어느덧 씻겨갔고 문득 노년은 발걸음조차 무겁다. “참 힘든 시절이었지.” 삶의 고비고비를 이겨 낸 구순에 지르는 비명이었다. 왜 이 노신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숨죽이는가? 황우겸의 삶이 곧 동산의 80년사와 대등하게 맞닿아 있는 바로미터이며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왜 동산을 모교라고 부를까? 동산은 이제 막 솜털을 벗은 소년들이 청년으로 뼈와 살이 급하게 성장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망아지들이 건장한 시민으로 자라기까지 성장통을 겪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80년이라면 세상사 대립각에 긁혀 구슬은 빛이 탁해지고, 오탁과 홍진의 인간사에서 금강석도 켜켜이 때가 끼기 마련이건만 동산은 그때마다 새 물결, 새로운 젊음이 와서 전통 위에 새 전통이 곁들여져 길을 내면서 그 빛남은 끊임없다. 우람한 동산은 이 위풍당당한 노신사 황우겸의 젊음과 기개를 무기로 사용했다.

 

 

졸업생 이미지

성명 이철호

직업 가수

졸업회수 1회

졸업연도 1942년

 

성명 김석배 (전수1회)

직업 사진작가

졸업회수 1회

졸업연도 1942년

주요경력

2017년 작고

남기는 글

제1회 졸업생의 추억담

 

  나는 가친(家親)의 막역(莫逆)한 친구로 우리 집 뒤에 사시던 김영배 씨, 삼심기선주식회사 사장 김종섭 씨, 그리고 당시 경성지방재판소 인천지원의 판사이시던 김세완 씨 등 설립자들께서 장차 5년제 상업학교로 발전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믿고, 1939년 당시 ‘인천상업전수학교’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였습니다.

  당시에 학교라고는 했어도 어쩌면 ‘서류상’ 존재한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율목동 무덕관의 가교사(假校舍)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A조와 B조 두 반으로 학생 수는 약 120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이 학교였지 운동장도 없는 가교사에다 교복은 모표도 없이 일본군이 쓰는 전투모를 쓰고 국방색(카키색) 군복차림에다 각반을 차고 다녔습니다. 모표는 약 반년 후에 만들어 달고 다녔습니다. 모표도 없는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하니 어린 나이에 참 창피하였습니다. 당시 김영배 교장선생님은 수신(修身)과 중국어를 가르쳐 주셨고, 영어, 국어(일본어), 부기, 수학, 국사(주로 일본역사), 세계역사, 지리, 체조 등을 선생님들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검도는 당시 일본 강도관 검도 5단(명예 7단)으로 연희전문학교 무도사범이시며 경기도 경찰국 무도사범이셨던 강낙원 선생(6.25 때 납북됨)께서 무보수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또 유도는 무덕관 관장이신 유창호 선생님께서 담당하셨고, 민법은 김세완 판사(후일 대법관)께서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일제말기로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고 전시체제라 교련은 필수과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교 출신 재향군인을 교련 교관으로 맞이할 형편이 안 되어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와 교섭하여 김영배 교장이 인천상업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로 하고 인천공립상업학교의 교련교관인 야마구치(山口) 육군중위를 시간 교관으로 초빙하였습니다. 그러다 2학년 무렵 다까이(高井) 준위가 정식으로 교련교관에 부임하게 되였습니다.

  1940년 2학년 때, 비로소 송림동에 신축된 교사(현재의 동산중고등학교 위치)로 이사하였으나 운동장이 마련되지 않아 재학생들이 방과 후 매일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운동장 건설에 참여하였습니다. 곡괭이와 삽으로 파낸 흙을 담은 담가(들것)를 두 명의 학생이 들어 날랐고, 나중에는 기차 레일을 깔고 리어카에 실어 날랐습니다. 지금의 운동장 일부를 당시 재학생의 땀과 노력으로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모교를 방문할 때마다 잘 다듬어진 지금의 운동장을 바라보면, 1940년 당시 운동장 공사에 동원되어 힘든 일을 하였던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래서인지 동산학교에 남다른 애착심이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범하여 전쟁을 하다가 무리하게 미국 하와이를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켜 남방공영권을 만든다는 미명 아래 전쟁을 확산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레이더(전파탐지기)를 개발하여 해군에 배치하여 레이더로 조준 사격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막강한 연합함대를 전멸시켰습니다. 또, 미국의 발달된 통신 도청 기술로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도(山本) 해군 원수가 탑승한 항공기가 발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가다르가날 상공에서 격추시키고 미국이 이 사실을 먼저 발표하여 일본 해군의 사기를 극도로 꺾어서 일본은 패전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와중에 학교에서는 이른 새벽에 상인천역으로 학생들을 동원시켜 재향군인 출정을 환송하도록 하였고, 남방전선으로 배치되기 위해 기차로 인천항으로 온 만주 주둔군을 환영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새벽에 학생들이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 일제 전쟁 수행의 도구로 이용되었고, 학교에서도 육체노동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시총동원령에 따라 학제나 교육과정이 편성될 정도이니 짐작할 만하지요. 그렇게 3년을 마치고 1942년 3월 7일 제1회로 졸업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후에는 차이나타운의 중국요리점 공화춘에서 사친회를 하고 해산하였습니다.

  오래 살다보니 모교의 개교 70년사에 미력하나마 글을 쓰게 되어 나로서는 남다른 감격을 느낍니다.

* 필자 : 1924년생, 사진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셨으며, 총동창회 홈피 단골이셨다. 총동창회 일에 열심히 참여하셨고 새까만 후배들과 즐겁게 교류하셨다. 2017년에 작고하셨다. 이 글은 ‘동산 70년사’에 수록된 글을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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