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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연중기획] 주판알 잘 튕겨야 출세하던 시절
  • 작성일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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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2. 60~70년대 최고의 취업 스펙은 주산 실력

▲ 1970년대 인천상의가 주관한 주산경기대회의 모습. 당시 인기직장이었던 은행에 들어가려면 보통 2급 이상의 주산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1946년 全인천주산경기대회

해방 이후 첫 기능보급행사


산업화 시기 필수 사무용품

전자기기에 밀려 내리막길



취업시즌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직장을 얻기 위해 영어, 컴퓨터, 봉사활동 등 갖가지 스펙 쌓기에 온 힘을 쏟는다. 30여년 전까지만해도 고용시장에서 우대받는 취업 스펙 중 하나는 주산 실력이었다.

개항장 인천은 다른 도시에 비해 일찍 근대적 상점과 회사가 많이 설립되면서 주산이 활성화 되었다. 1924년 2월3일 인천주산경기회와 인천남상업학교 주최로 부내 상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은행원, 상점원 등이 참가한 주산경기대회가 열렸다. 속산(速算), 전표산(傳票算) 등 9개 분야에서 실력을 겨뤘는데 주로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에 근무하는 현직 은행원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20년대 후반 유도 사범 유창호는 당시 인천의 유지 최승우, 김윤복의 도움을 받아 율목동 유도관 2층에 인천 최초의 주산·부기 학원인 상업전수학교를 개설했다. 후에 이 학교는 동산중학교로 승격했고 더 나아가 동산고등학교로 성장했다. 1936년부터 인천부(현 인천시)와 인천상공회의소는 공동으로 매년 2주간 매일 밤 두 시간 동안 인천공회당에서 상점실무강습회를 열었다. 부내 각 상점 1명씩 총 50명을 대상으로 주산, 부기, 상사요항(商事要項)을 가르쳤다.

광복 후 인천은 우리나라 주산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인천상의 11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인천상공회의소는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전(全)인천주산경기대회를 개최했다. 1946년 10월26일 실시한 제1회 대회는 8·15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기능보급행사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주산경기대회의 효시였다. 1949년 제4회 대회를 치르기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해 왔으나 6.25 전쟁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다.'

인천 출신 주산인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1960년 10월8일 문교부 주최 제6회 주산능력검정고시가 서울상고와 덕수상고에서 응시자 5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그들 중 인천송현국민학교 6학년생 전숭영(12) 양이 역대 최연소로 2급에 응시, 언론에 주목받기도 했다. 1965년 5월 일본, 자유중국, 마카오, 멕시코 등이 참가한 제3회 세계주산회의가 경희대 강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인천여상 강인구 교사가 '주산기능에 미치는 요인 분석'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이듬해 12월 자유중국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일 세계주산대회에는 이봉운 인천상의 부회장이 대표단 단장을 맡아 참가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