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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69]청소년운동과적십자
  • 작성일2000.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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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소년적십자의 단원으로서 마음과 몸을 건전히 하여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며 나라의 발전과 인류평화를 위하여 활동할 것을 맹세합니다.”

사랑과 봉사, 박애정신을 집약한 이 구호는 청소년적십자의 '단원 맹세'다.

청소년적십자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캐나다, 미국, 호주의 청소년들이 유럽의 전쟁청소년들을 위문하고 돕기 위해 학용품 등의 구호품을 모아 보내면서 시작됐다. 이어 전쟁이 끝난 뒤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제9차 적십자국제회의에서 적십자 안에 청소년적십자를 둘 것을 결의, 청소년 봉사활동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청소년적십자'가 출범했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적십자 활동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겨울,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행복고아원'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백여명의 각 고등학교 대표들이 '행복고아원'에서 '제1회 청소년적십자 간부강습회'를 갖고 그 이듬해인 1953년 4월 5일 적십자 깃발 아래 푸른 조국강산을 기원하며 1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으로 청소년 적십자활동의 시작을 알렸다.

인천에 청소년적십자단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55년. 그해 2월 6일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당시 경기도지사) 직제에 청소년과가 신설되면서 인천고등학교에 최초로 청소년적십자단이 결성됐다. 이어 동산고 등 다른 고등학교로 청소년적십자가 확산, 당시 2백여명의 학생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인천지역 청소년운동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3·1 운동 이후 인천에서 활동한 청소년단체들은 '인천엡윗청년회', '인천이우구락부', '인천한용단 및 인천한용회', '인배회', '제물포청년회', '조선소년군', '소성청년회', '인천본보기소년회', '인천소년회' 등 매우 다양했다. 이들 단체는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활동을 벌였으나 대원보충도 어려웠고 민족주의를 앞세운 지도자들의 활동에도 많은 제약이 뒤따랐기 때문에 존속하기 어려웠다.

이어 해방 이후 청소년 운동이 학교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청소년적십자는 오랫동안 학생 봉사활동의 대명사로 꼽혔다. 지금은 청소년적십자의 영문명칭이 'R·C·Y'(Red Cross Youth)지만 설립 초기의 명칭은 'J·R·C'(Junior Red Cross)였다.

그 무렵 인천지역 고등학생들 사이에선 'J·R·C'를 속칭 '지랄시'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 만큼 청소년적십자단의 봉사활동 강도가 결코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0년대에 남달리 적극적으로 청소년적십자 활동을 벌인 학생들로는 서한샘국회의원을 비롯, 조한웅(광고회사 대표), 정성옥(목사), 한문자씨(교사) 등이 알려져 있다. 이중 서의원은 동산고 1학년에 재학중이던 1959년 동산고청소년적십자단 단장을 비롯 청소년적십자 경기도협의회 의장과 전국협의회 부의장을 맡은 '열성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청소년적십자 활동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지금도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알고 보다 성숙한 의식을 갖게 해준 것은 바로 청소년적십자였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학교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어느샌가 이들이 나서 적십자활동을 통해 익힌 응급처치 기술로 부상자들을 돌봐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