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자료
사람들은 늘 부(富)를 축적하는 일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개인이나 기업이나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러나 돈을 버는 일에만 매달리면, 자칫 그 옳은 쓰임새를 잃기 십상이다. 그래선지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갑부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100여년 전 인천의 거부로 불리던 유군성의 삶은 요즘 갑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옛 인천의 부자', '조선 최고의 납세자', '우리나라 첫 근대 정미업소 운영'.
강화출신의 유군성(劉君星)을 일컫는 표현이다. 1880년 태어나 일제 강점기 국내를 대표하는 최고 상업가로 활동했지만 그의 행적은 철저히 잊혀졌다. 당시 시대상을 볼때 부호라면 일반적으로 친일파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로써 자신 역시 사회의 전면에 나서기를 꺼린 듯 싶고 발자취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박헌용이 1932년 집필한 강도지(江都誌)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본관은 강릉으로 강화 월곶리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적 부모를 잃고 약관의 나이에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주하였다. 민첩하고 수완이 남달라 점차 상업계에서 선구자라는 명예를 얻었으며 큰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는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성품을 지녔다. 목재업, 정미업을 경영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심각한 손실을 본 적도 있다. 또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향리인 강화의 크고 작은 일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이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 도타운 성정(性情)과 풍모(風貌)에 대하여 칭송하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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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 인천항에서 쌀을 하역하는 장면. |
1979년 발행된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서는 유군성이 강화에서 출생, 네살때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고 스물아홉에 목재상을 시작한 것으로 적었다. 또 1993년도 인천시사 자료집은 '10여세 때 인천으로 옮겨와서 자수성가했다'고 말한다.
사망한 날짜가 1947년이므로 그의 생전에 쓰여진 강도지에 가장 신빙성이 높지만 워낙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작은 돈벌이에서 시작해 다양한 종류의 장사를 한 것에는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다. 제재소를 시작으로 이후 정미업을 겸했으며 193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인천상의에 따르면, 유군성이 1931년 납부한 영업세가 74원40전으로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형상점보다 훨씬 많아 그 규모를 예측했다.
사업가로서 그의 활동상은 정미업을 하면서 가장 두드러진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기록들이 '유군성 정미소'가 중구 신흥동에 문을 연 시기를 1924년, 정미기 5대를 갖추고 남녀 직공 70여명이 하루에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천향토사료조사사항(1915년 )'에서 유군성의 최초 공장은 18년 앞선 1906년 9월 세워졌고 전국서 한국인이 운영하던 27곳의 동종 분야 가운데 최고 자본금을 보유했다고 적고 있다. 자본금은 2천엔으로 1898년 기준으로 지금과 33만배 차이가 난다고 가정하면 현 52억여원에 달할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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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광고-인천목재상조합에서 게재한 광고로 오른편에 '유군성상점재목부'가 명시돼 있으며 주소는 현 사동 25로 나왔다. |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2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에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미업계에서 큰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볼때 상업적 수완이 무척 뛰어났다고 보인다"며 "다만 자본금의 규모에서 단독으로 사업을 벌이지는 않고 동업의 형태로 운영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셀 수 없을 만큼의 선행을 베푼 그의 미담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정미소에서 쌀을 훔친 여공의 가정에 땔나무와 약을 보냈으며 모친의 회갑날에는 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모두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937년 김도인이 발행한 '월미' 창간호에서 임가삼(林可參)은 '대(大) 인천의 인물은 누구 누구?'란 꼭지의 글에서 유군성을 설명하면서 '조선인측 최고 납세자로는 유군성씨인데 재산보다는 사업이 많고, 지식보다 덕망이 훨씬 높기로 경향(京鄕)에 유명하신 인천의 원로로 숨은 자선행위가 한이 없건만 자기일 홍내는 것을 싫어하야 사진 한 번 내여 본적이 없다. 부의(府議)같은 공직을 일체사회하시고 다만 선거회장에서 입회인으로 자임하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자연히 머리를 숙인다'고 적고 있다.
사업가로, 덕망가로 이름이 난 유군성은 중등교육기관 설립에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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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6월 11일 동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후 현판식을 진행하는 모습. /동산중·고 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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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군성은 동구 송림동에 위치한 동산중·고등학교의 탄생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법인 동산육영회가 지난 1988년 펴낸 '동산50년사'에서 교육에 큰 뜻을 품었던 그의 행적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을 위한 학교 설립을 인정하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설립허가서조차 제출할 수 없었던 1938년. 지금의 동산중·고교의 요람인 인천상업강습회가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체계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정규기관은 아니었다. 이때 한 단계 높이 발돋움하도록 재정적 도움을 준 인물이 바로 유군성이라고 한다.
1939년 초 3년제 6학급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하는데 5명의 설립위원이 뛰어든다. 김윤복, 김종섭, 김세완, 유군성, 이흥선 등이다. 재정을 담당한 유군성은 이흥선과 함께 돈을 거둬 교사를 짓기 위한 부지를 찾아 나선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중학교가 자리한 47번지 일대다.
전체 면적이 1만여㎡를 약간 밑돌았다. 최근 중·고교를 통틀어 한 기관의 부지가 평균 1만5천여㎡를 차지하니 상당한 면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잠시였다. 재정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유군성을 비롯한 설립위원 5명은 재단법인을 만들기 위해 인천 출신으로 서울에서 재력가로 소문난 최승우 선생을 찾아가 어려움을 설명하고 일체의 권한를 양도하기에 이른다.
김건수 동산고등학교 교장은 "유군성 선생이 학교 인가를 받고 교지를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며 "하지만 지속적 운영에는 스스로 한계를 느꼈고 먼 훗날 우리나라의 교육을 위해 중대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밝혔다.
'동산 50년사'는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내가 학교의 설립자라는 개인주의적 차원을 벗어나 원대한 조국발전의 앞날을 내다보는 참되고 거룩한 모습은 이렇게 순수하게 살아 있었다"고 유군성 등 5명을 회고한다.
이 교육사업에 재산의 많은 부분을 내놓았을 유군성의 흉흉하면서도 대담한 말년은 '인천시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제 말기 통제시대에 들어서자 사업이 차츰 기울어 갔고 그리하여 매우 궁급한 가운데서 마쳤다. 사업장의 문을 내릴 때도 재산을 정리하면서 자식들만이 아니라 부리던 사람들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분배하는데 인색치 않았다."
고일 선생 역시 '인천석금'에서 유군성에 대해 "화재로 손해를 보았었고 미두도 실패는 했을망정 그의 이름은 향토인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고 밝힌다.
오늘날 모두가 유군성을 정확히 찾아내고, 이를 다시 새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일 선생의 얘기는 여전히 현재진행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