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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8] 1936년의 출발… 2026년 과제는
  • 작성일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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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대한민국 스포츠의 뿌리 인천 체육이 마주할 100년… 스타트

1883년 개항과 함께 서양식 스포츠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인천은 대한민국 근대 체육의 출발점이다. 야구와 축구, 육상, 레슬링 등 다양한 종목이 인천에서 싹을 틔웠고 수많은 국가대표와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을 이끌어 왔다. 최근에는 인천체육회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45년 앞선 1936년 창립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인천 체육의 역사적 위상도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역사 뒤에는 저출생과 학령인구 감소, 선수 수급난, 우수 선수 유출 등 새로운 과제도 놓여 있다. 창간 38주년을 맞은 기호일보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산실인 인천 체육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1920년 조성된 웃터골 운동장은 서울 경성운동장보다 6년 앞선 국내 최초의 공설운동장으로 평가받는다

 

# 대한민국 스포츠의 뿌리, 인천

1936년 1월 11일 저녁 인천 중구 산수정 공회당. 권투와 농구, 축구, 야구 등 근대 스포츠 종목 관계자들은 물론 궁술 등 전통 체육인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인천체육회의 출범을 알렸다.

출범대회는 경과보고와 회칙 제정, 회장과 집행부 선출 순으로 진행됐고 초대 회장에는 김윤복이 선출됐다. 89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창립은 단순한 지역 체육단체 하나의 탄생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인천체육회는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기도체육회에서 분리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인천시체육회 역시 홈페이지 연혁에서 ‘1981년 직할시 승격에 따라 경기도체육회에서 인천직할시체육회로 분리’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인천 체육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조준호 박사의 ‘인천체육사 연구’와 당시 신문기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아일보는 1936년 1월 14일 자 기사에서 인천체육회 창립 행사 내용을 전하며 인천에서 각종 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이를 총망라한 통제기관이 없어 일반 유지 수십 명이 발기인이 돼 인천체육회 창립을 추진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준비를 마친 인천 체육인들이 11일 오후 7시 30분 산수정 공회당에서 창립행사를 열었고 인천체육회가 권투와 농구, 축구, 야구 등 근대 스포츠는 물론 궁술 같은 전통 체육까지 아우르는 조직이었다고 전했다. 당시 찬조회원만 110여 명에 달했다는 내용도 함께 실렸다.

  

1970년 아시안게임선수단 거리환영식.

 

조선일보 역시 같은 해 2월 28일자 기사에서 인천체육회의 활동을 보도했다. 신년도 예산을 논의하고 특별회원과 찬조회원을 모집해 약 3천 원의 예산으로 회관을 신축하고 각종 체육사업 경비를 충당하기로 결의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인천 체육계가 일제강점기부터 독자적인 체육 조직과 운영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역 체육 행정의 초기 형태가 이미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실제 1920년대 신문과 잡지에는 인천 체육계의 움직임이 꾸준히 등장한다. 조선일보 1923년 6월 22일 자 석간 1면에는 ‘인천 노동계와 체육계의 발전’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대한매일신보에는 ‘인천 야구계를 위하여’라는 글이 소개됐다. 지역 잡지 ‘월미’에도 ‘인천 권투계의 장래’라는 글이 실리는 등 당시 인천 체육계의 왕성한 활동상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 인천은 근대 스포츠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도시였다. 1920년 조성된 웃터골 운동장은 서울 경성운동장보다 6년 앞선 국내 최초의 공설운동장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도원동 공설운동장과 문학경기장,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체육 인프라는 전국체전과,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을 치르며 대한민국 스포츠의 중심 무대로 자리매김했다.

인천은 단순한 지역 체육의 한 축이, 또 지역사의 일부가 아니었다. 개항 이후 서양식 스포츠가 가장 먼저 유입된 도시였고 야구와 축구가 뿌리내린 곳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장창선을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또 일제강점기 체육단체를 조직했으며 광복 이후 한국 스포츠의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한 대한민국 체육사의 중요한 뿌리다.

# 메달로 쓴 인천 체육의 역사

인천 체육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스포츠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천 출신 선수들은 지금까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397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메달 59개, 아시안게임 메달 285개, 세계선수권 메달 53개로 대한민국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성과다.

인천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결정적 순간은 1966년이었다. 인천 출신 레슬러 장창선은 미국 톨레도에서 열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선수권 금메달이었다.

장창선의 금메달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세계 경쟁력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인천은 농구와 야구, 양궁, 핸드볼, 수영, 펜싱 등 다양한 종목에서 국가대표와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며 한국 스포츠를 이끄는 핵심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장창선 선수.

 

인천 체육의 힘은 특정 선수 몇 명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지역 학교들이 만들어 온 탄탄한 선수 육성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송도고는 한국 농구의 명문으로 꼽힌다. 추헌근과 유희영을 시작으로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신기성, 김승현, 김선형까지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를 꾸준히 배출했다. 인성여고 역시 정희숙과 조영란, 정은순, 유영주, 김소담 등 여자 농구 국가대표들의 산실이었다.

야구에서는 인천고와 동산고가 한때 한국 야구를 이끌었다. 인천고는 박진만과 최원호, 정재복, 이재원, 김재환 등을 배출했고 동산고는 류현진과 송지만, 정민태, 송은범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길러냈다.

양궁은 인일여고와 인천재능대가 대한민국 양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인일여고는 윤영숙과 박영숙, 박정아를 배출하며 한국 여자 양궁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인천재능대는 박경모와 김경호를 중심으로 남자 양궁의 명맥을 이어왔다. 핸드볼에서는 인천여고와 선화여상, 정석항공공고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고 광성고와 부평여고, 인천체고 역시 다양한 종목의 국가대표를 배출하며 엘리트 체육의 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교야구대회.

결국 인천 체육의 역사는 메달의 역사이자 학교의 역사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역 학교들이 쌓아 올린 선수 육성 시스템이 있었기에 인천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산실로 불릴 수 있었다.

인천은 선수만 길러낸 도시가 아니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무대를 만들어 온 곳이기도 하다. 1978년과1983년, 1999년, 2013년 네 차례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하며 전국 스포츠인의 축제를 치러냈다. 특히 2013년 전국체전은 이듬해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주요 경기시설과 대회 운영 역량을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2014년에는 아시아 최대 스포츠 축제인 인천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45개 국 1만3천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대회는 인천이 국제 스포츠도시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됐다.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과 문학박태환수영장, 선학국제빙상경기장 등 국제 규격의 체육시설도 이 시기 조성됐다. 이후 이들 시설은 각종 국제대회와 전국대회의 무대가 되며 지역 선수들의 훈련 기반이자 시민 체육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 영광 뒤에 드리운 그림자

하지만 화려한 역사와 풍부한 인프라, 대한민국 스포츠의 산실이라는 명성 뒤에는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저출생과 학령인구 감소는 엘리트 체육의 근간인 학교 운동부를 흔들고 있다. 과거에는 학교마다 운동부 창단이 이어졌지만 이제는 기존 팀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인천지역 539개 학교 가운데 운동부를 운영하는 학교는 240곳이다. 304개 운동부에서 3천194명의 학생선수와 321명의 지도자가 활동하고 있지만 체육계는 선수층 감소를 가장 큰 위기로 꼽는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일부 종목은 선수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학생 수 감소로 팀 운영 자체가 어려워지는 학교가 늘고 있고 종목에 따라서는 명맥을 이어가기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려는 학생이 줄면서 일부 종목은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학교 운동부 위축이 지역 체육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우수 선수 유출도 해묵은 과제다. 인천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대학 진학과 실업팀 입단 과정에서 타 시도로 떠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지역 체육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체육계 안팎에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좋은 선수 한 명을 발굴하는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우수 선수를 길러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사람을 키우는 체육”…다음 100년의 과제

인천 체육은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1936년 창립한 인천체육회는 대한민국 지역 체육의 선구자였고, 인천은 수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국가대표를 길러낸 도시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과제는 또 하나의 금메달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선수 육성시스템을 구축하고 지역 체육의 토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규생 인천시체육회장은 “앞으로의 경쟁력은 몇 명의 스타 선수를 키우느냐보다 지속적으로 우수 선수가 나오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소년 선수 기반의 축소를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며 “학교체육과 스포츠클럽, 생활체육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인천 체육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수 선수가 인천에서 성장하고 은퇴 이후에도 지도자와 행정가로 활동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스포츠과학과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한 과학적 선수 육성시스템도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

 

문학경기장.

 

생활체육 저변 확대도 과제다. 더 많은 청소년이 운동을 접하고 재능 있는 선수가 전문 체육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체육계는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인천 체육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해법이라고 보고 있다.

웃터골 운동장에서 시작된 작은 공 하나는 세계선수권 금메달과 올림픽 정상, 그리고 수많은 국가대표의 꿈으로 이어졌다. 이제 인천 체육은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음 세대의 장창선과 류현진, 이우석과 전훈영을 길러낼 토양을 만드는 그것이 대한민국 스포츠의 뿌리인 인천이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