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자료

[고교야구 레전드] 국내 최초 전국대회 3연패, 동산고 신인식
  • 작성일2022.10.09
  • 조회수787
[MHN스포츠] 1955~57년 전국대회 3연패 일궈내며 가장 임펙트있는 모습 선보여

청룡기 3연패 당시의 동산고. 신인식은 이 3연패의 당당한 주역이었다. 사진=인천야구 한세기

 

 

(MHN스포츠 김현희 기자)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40년이 흘렀다. 이에 맞춰 한국 프로야구를 이끈 레전드 40명 선정도 발표가 끝난지 오래다.

40명 모두 지난 40년간 한국 프로야구를 이끈 선수들임엔 분명하다. 40명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41~50위를 차지한 레전드들도 분명 한국 야구를 빛낸 이들이다. 그러나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프로야구 이전에 대한민국은 ‘고교야구’에 열광했다는 사실. 패기에 가득 찬 고등학생들의 열정이 동대문야구장과 목동 야구장에 그대로 녹아 들었다.

100년 고교야구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에서는 여전히 ‘선수권대회(고시엔 대회)’가 인기를 끈다. 일본 야구 유학을 다녀 온 이들은 하나같이 “일본에서는 도쿄대를 나왔다는 사실보다 고시엔에 가서 경기를 치러 본 것을 한 수 위로 여긴다.”라며, 현지의 뜨거운 열기를 알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 40년’이 되는 현 시점에서 고교 무대를 수놓은 스타들의 존재도 분명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교 야구 전국 대회가 태동했을 때, 인천 야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동산고 신인식도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고교야구 레전드 6)편,
인천의 최초, 동산고 신인식 ‘전국대회 3연패’

만약에 한국 프로야구가 약 10년 먼저 출범했다면, 1982년 프로 원년 우승팀인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전신)나 전통의 강호 삼성 라이온즈가 강세를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년 기준 6팀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히려 ‘삼미 슈퍼스타즈’가 무서운 기세를 탔을지 모를 일이었다. 의외라 생각할 수 있지만, 1회 전국대회가 열렸을 당시로 돌아가 본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대표에서 대표팀의 막내 에이스로 거론됐던 인천고 서동준의 존재도 그러했지만, 전국 대회 최초의 3연패 팀이 인천 동산고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특히, 한국 전쟁 이후 재개된 청룡기 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인천 야구의 강세는 이어졌는데, 그 중 1955~1957년에 동산고는 청룡기에서 3연패를 달성했다. 바로 그 중심에 있던 이가 에이스 신인식이었다.

신인식은 1학년이었던 1955년에 동산고가 3연패에 도전하던 인천고에 2-1로 신승하면서 대회 MVP에 오를 수 있었다. 이듬해에도 중앙고에 1-0 승리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한 동산고는 신인식이 3학년이었던 1957년에 또 다시 인천고를 만나 3-1로 승리했다. 재학 당시 세 번 모두 우승을 차지한 것도 진기록이었지만, 두 번이나 MVP를 받은 것도 상당히 대단했다. 그만큼 신인식은 비범한 선수였다. 그런데, 2학년 때에도 MVP를 받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결승전에서 중앙고를 상대로 거둔 1-0 승리도 신인식의 노히트노런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국내 유일의 선수권대회(Championship)인 청룡기에서는 특정 학교가 3연패를 하면, 우승기를 영구 보관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동산고는 청룡 우승기를 영구 소장한 최초의 학교가 된 셈이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동산고에서는 청룡기 3연패 기념 공간 제막식을 갖기도 했다.

고교 시절의 임펙트만 놓고 봐도 신인식은 말 그대로 ‘철완’이었다. 특히, 결승전과 같은 큰 무대에서 더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2학년 결승전 노히트노런 외에도 3학년 결승전에서는 연장 12회까지 혼자 마운드를 지키는 임펙트를 선보인 바 있다.

이렇게 가장 화려한 고교 시절을 보낸 신인식은 앞서 소개한 ‘레전드’들과 비교하면, 대학/실업무대에서는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연세대와 대한통운(1962~1968년)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청룡기 선수권 3연패 당시의 임펙트를 보여주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고교야구 레전드’를 언급할 때 가장 적합한 선수이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는 경희대학교 감독과 대학선발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로 활약했다.